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 가수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 하겠다고 했다. 과연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을까?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 틀에 벗어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루에 한번 이상은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고, 하루에 다섯 번은 문자를 보내야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사랑은 미움으로 변한다. 그럴 경우 사랑은 미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타령에 대한 노래가사를 보면 사랑에 대한 기쁨은 물론 미움, 질투, 등 부정적 마음의 요소가 모두 망라되어 있다.
사랑을 나름대로 규정 지어 버리면 폭력이 될 수 있다. 데이트폭력이 일어나는 것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 갈애에 따른 사랑은 갈애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분노로 표출된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사랑은 욕망이 개입된 것이다.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 거절 되었을 때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본래 탐욕과 성냄은 일란성 쌍동이 같은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는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하는 것이 탐욕이고, 대상에 대하여 싫어 하는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내려 하는데 이것이 성냄이다. 대상에 대하여 호불호와 쾌불쾌에 끄달리는 한 탐욕과 성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인사이 또는 부부사이에 오로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애증의 관계가 된다. 내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랑이 미움이 되는 것은 식은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다반사이다. 유행가에서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거나 사랑이 슬픔이라고 말 하는 것에는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은 추상명사형이다. 추상명사는 실체가 없다. 오로지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속에서만 있는 명사는 수없이 많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 누군가 자유나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데올로기(理念)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데아처럼 무언가 이상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이념으로 삼으면 자본주의 가치관을 따를 것이다. 평등의 이념은 사회주의로 구현될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이념은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르지 않으면 제재가 가해진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든지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 이를 이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기업에서도 경영이념이 있다. 어떤 회사에서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기도 한다. 심지어 조폭에서도 행동강령이라 하여 이념이 있다. 조직원들은 이념에 충실히 따라야한다. 이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제재가 가해진다. 이렇게 본다면 이념은 폭력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때는 유교가 국시였다. 그래서 삼강오륜이 통치이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삼강오륜은 폭력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을 이념의 틀 안에 가두어 놓았을 때 폭력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노자 도덕경 제1장을 보면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고 했다. 여기서 후자의 명에 대한 것을 보면 “명칭에 대하여 그런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더 이상 그런 명칭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사랑에 대하여 눈물의 씨앗이라고 정의 내려 버리면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금강경에서도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일 뿐이다.”라고 했다.
부처님이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름이나 명칭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설명했을 때 반야바라밀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다.”라고 말 했을 때 더 이상 그런 반야는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강조한 것은 산냐(saññā: 想)의 척파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상을 부수자는 것이다. 언어에 매인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아상(我相)을 버리라고 했다. 자신에 형성되어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사람에 대하여 형성되어 있는 이미지와 같은 고정관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예전의 그사람은 그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전의 그사람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은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고 나를 해코지한 사람은 나쁜 사람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은 변해가도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는 변함이 없다. 지금 이순간 오온은 생멸을 거듭하며 변하고 있지만 고착된 이미지는 그대로 있다. 나의 오온도 변하면 상대방의 오온도 변한다.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대상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에 대하여 고착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과거의 이미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I am not what I was.” 이말은 중학교 3학년때 영어교과서에 나온 말이다. 그때 당시 이 말이 너무 와 닿아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왜 이 말에 필이 꼽혔을까? 그것은 옛날의 나가 아니라 새로운 나로 다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불교의 무상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명구라고 생각된다. 또한 산냐를 척파하는 말이라고도 생각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다. 거의 이십년은 된 것 같다. 세월이 흘러서일까 머리가 벗겨졌다. 옛날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다. 이제까지 그 친구의 이름에서 이십년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몸만 변했을까?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발로 되어 있는 오온에서 몸만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순간 변하는 오온에서 정신적으로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이미지에만 매달려 있다면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는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이다. 그는 나를 비난하고 욕했다. 이에 분노가 일어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로부터 비난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보다 뛰어나고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부터의 충고는 수용할 만 하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보다 못한사람으로부터 비난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폭발한다.
분노가 일어나면 비난에 비난으로 대응하고, 성냄에 성냄으로 대응한다. 마치 화풀 하듯이 분노를 표출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낼까 생각해보지만 마음만 상할 뿐이다. 그런 상대방은 오히려 기고만장하여 분노만 돋군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면 나자신이 통제되지 않는다. 하물며 분노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의 과거 이미지에 집착하여 내뜻대로 하고자 했을 때 이는 ‘폭력’이다.
폭력남편이나 폭력아내, 폭력엄마가 되는 것은 내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고정된 상에 집착했을 때 일어난다. 그런 상을 이념이라 할 수도 있고, 이름이나 명칭과 같은 추상명사라고 할 수 있다.
한번 상에 고착되면 폭력적으로 될 수 있다.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동강령에서 벗어났을 때 제재가 따른다면 폭력이 된다. 이렇게 따진다면 국가 공권력도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힘을 가진 것은 기본적으로 폭력성울 내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념에 집착하는 한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참여 하는 것도 폭력적인 요소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사회참여라는 것은 본래 분노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분노하는 것이기 때문에 폭력으로 변질된 위험요소가 늘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교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참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종단의 부조리와 모순과 위선에 대하여 지적한다. 때로 피켓시위나 기자회견, 촛불법회 등으로 의사표현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는 넓은 의미로 보아 분노의 표출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분노 또는 자비의 분노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개혁이 좌절되었을 때이다.
사회참여는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기반으로 한다. 수행을 하여 자신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자리행(自利行)이고, 사회에 참여 하여 공동체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 이타행(利他行)이다.
만약 자리행은 없고 이타행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 수행없이 사회에 대하여 분노만 표출한다면 거칠어질 것이다. 사회에 분노한다고 하여 참여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럴 때 좌절한다. 자리행이 되어 있지 않다면 분노가 내부로 향할 것이다. 이럴 때 누군가 희생양이 될 지 모른다.
사람들은 호불호와 쾌불쾌에 따라 쉽게 감정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좋아함과 싫어함이 분명한 사람이 그렇다. 유명인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교황도 화를 냈다고 한다. 팔을 잡아 끄는 여인에게 역정 낸 것이다.
하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속담에 “공든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분노하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분노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화를 내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고객과 싸우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분노하면 안간관계가 파괴된다. 홀로 고립을 자초하려 거든 분노하면 된다. 자리행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사회참여 하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모든 것을 내뜻대로 하고자 했을 때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이름이나 명칭에 집착했을 때,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을 때 폭력적으로 된다. 자리행이 되어야 이타행을 할 수 있다.
“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Dhp.3)
“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 (Dhp.4)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니
이러한 것을 자각하면
그 때문에 다툼이 그친다.” (Dhp.6)
2020-0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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