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다음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황령산산지기 2019. 12. 21. 07:00



모든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작업파일이 완성되었다. 캐드를 이용한 패턴설계 역시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먼저 회로도를 받아 부품작업부터 먼저 한다. 이를 부품라이브러리를 만든다고 한다. 한번 만들어 놓으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도서관에 있는 책과 같은 것이다.

 

필요할 때 꺼내 쓴다고 하여 부품라이브러리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만든 부품라이브러리를 회로도에 입력하는 작업이다. 저항 같은 경우 수십가지가 있지만 사이즈는 한가지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라이브러리에서 꺼내와서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회로도에서 라이브러리입력작업이 끝나면 그 다음 단계는 네트리스트 형성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에러를 잡아 낼 수 있다.


오류리스트가 발생하면 하나하나 잡아 나가는 것이다. 마침내 네트리스트가 완성되면 그 다음 단계는 부품배치단계이다. 이후 패턴을 연결하는 라우팅단계를 거친다. 최종적으로는 오픈과 쇼트 베러파이를 한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고객에게 넘기면 된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어느 것이든지 단번에 되지 않는다.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해야 한다.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쉬어가면 된다. 매일매일 한두시간 또는 그 이상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넘어진 것을 계기로

 

돈오돈수라는 말이 있다. 한번에 몰록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마치 계단 올라가듯이 한단계 한단계씩 밟아 올라가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점차적인 깨달음을 말씀했다.


초기경전을 보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어느날 갑자기 엘리베이터 타듯이 쑥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는 가능할지 모른다. 테라가타 271번 게송부터 274번까지 게송을 보면 바구존자가 넘어졌을 때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

 

 

좌선중에 혼침이 일어나면 더 이상 좌선이 힘들것이다. 그럴 때는 일어나서 걷는 것이 낫다. 바구장로는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고자 경행처로 올라가다가 넘어졌다.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넘어지는 순간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또한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혼침으로 인하여 사띠가 깨졌을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바구장로는 다리를 주무르고 난 다음 다시 경행처로 올라가서 경행을 했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안으로 잘 집중하여 경행처에서 경행을 했다.”(Thag.272)라고 되어 있다.


안으로 집중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명상주제에 잘 집중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순간집중에 해당될 것이다. 발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했을 때 삼매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순간집중을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라고 한다. 경행에 따른 순간집중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이어지는 게송이 말해준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273)

 

 

순간집중으로 인하여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은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사대를 관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행을 하면 지, , , 풍 사대를 관찰할 수 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서는 이 몸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지고, 부모에서 생겨나고, 밥과 죽으로 키워지는 이 몸은 무상하고,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지고, 부수어지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의식은 여기에 의존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ThagA.II.11)라고 설명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에 대한 결실’(D2)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바구장로는 넘어진 것을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경행을 통해서이다. 경행으로 사대를 관찰한 것이다. 넘어진 것을 계기로 하여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늙어가고 병이 들어감에 따라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몸을 나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대표적으로 얼굴을 들 수 있다. 내세울 것이 없는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안달복달할 것이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육체는 자신의 모든 것과 같다. 그러나 세월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갈 때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발견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젊었을때에는 몰랐던 것을 늙었을 때 아는 수가 있을 것이다. 관절에 이상이 생겨서 잘 움직이지 못했을 때 더 이상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일으키라고 했다.

 

 

보라. 아름답게 꾸며진 영상,

상처투성이로 세워진 몸,

고통스럽고 망상으로 찬 것,

영원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Dhp.147)

 

이 영상은 마침내 노쇠하고

질병의 소굴로 쉽게 부서진다.

이 부패한 축적들은 파괴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Dhp.147)

 

참으로 가을에 버려진

이 호리병박들처럼

회백색의 해골들이 있다.

그것들을 보고 어찌 기뻐하겠는가?” (Dhp.147)

 

뼈로 만들어지고

피와 살로 덧칠해진 도시,

거기에 늙음과 죽음과

자만과 위선이 감추어져 있다.” (Dhp.147)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

 

바구장로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여 깨달았다. 그것도 넘어진 것을 계기로 하여 깨달았다. 그런데 이처럼 넘어져서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테리가타에도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담마장로니의 게송이다.

 

 

탁발을 다니다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없이

흔들리는 팔다리로

땅바닥에 넘어졌는데,

몸에 일어난 그 재난을 보자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 (Thig.17)

 

 

담마장로니는 탁발을 가다가 넘어져서 깨달았다. 그런데 지팡이에 의지한 몸이 힘이 없어서 땅바닥에 넘어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나이가 들어 노화되어 신체를 지탱하지 못해 넘어진 것이다. 앞서 언급된 바구장로의 게송에서는 혼침 때문이라고 했으나 노화에 따른 요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담마장로니는 힘없이 넘어진 자신의 모습에서 재난을 보았다고 했다. 이제까지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하여 몸을 의지하여 살아왔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주석에서는 몸에 대한 부정(不淨)과 무상(無常)과 괴로움()과 실체없음(無我) 등의 여러가지 관점으로 몸의 결점을 지혜의 눈으로 보았다고 설명되어 있다.

 

칠세아라한과 돈오점수

 

사람은 넘어져 보아야 알 수 있다. 늙고 병들어 넘어졌을 때 이 몸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이 몸이 나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구장로와 담마장로니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을 보면 공통적으로 넘어진 것에 있다. 넘어진 것을 계기로 하여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닦음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사향사과로 설명할 수 있다.

 

사향사과는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사향사과에서는 공통적으로 열반이 있어서 돈오이고, 사향사과에서는 단계적 깨달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점수라고 볼 수 있다. 사향사과의 마지막단계는 아라한과이다. 아라한의 단계가 되면 깨달음의 완성이 된다.


이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아는 아라한선언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놀랍게도 칠세 아라한도 있다는 사실이다. 밧다장로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후 겨우 칠 년 만에

구족계를 나는 받았고,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여법한 훌륭한 가르침이여!(Thag.479

 

 

어떻게 일곱살에 아라한이 되었을까? 이는 타고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전생에 수행자였던 사람이 지혜를 타고나서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렇게 지혜를 타고난 사람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말을 알아듣고 사리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아라한이 된 것이다.

 

밧다장로의 인연담을 보면 칠세아라한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사밧티시에 사는 어느 부부가 아들이 없어서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만약에 저희들이 아들을 얻으면, 그 아이를 당신의 시자로 바치겠습니다.”(ThagA.II.199)라고 서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서원을 어느 천신이 듣고 있었다. 수명이 다한 천신은 부처님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데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아무게의 집안에 태어나라.”라고 지시를 받고 거기에 태어난 것이다. 부부는 아이가 자라서 일곱살이 되자 약속대로 세존이시여, 이 아이는 당신께 요청하여 얻은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당신께 이끌어 주십시오.” (ThagA.II.199)라고 말했다.

 

일곱살에 출가한 아이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출가한 그날 해가 지기전에 수행에 매진하여 여섯 가지 곧바른 앎(六神通)을 얻어서 칠세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칠세아라한은 돈오돈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생에도 단계적인 깨달음의 괴정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에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지혜는 타고 나는 것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다. 집을 지어도 일층, 이층, 삼층으로 지어 간다. 큰 빌딩이라면 먼저 토목공사부터 해야 한다. 땅을 파서 기초를 단단히 한다음 올리는 것이다. 수십층짜리 빌딩을 보면 단계적으로 올라간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전생부터 수행자로 살아 온 사람이 이번생에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혜를 타고나야 한다. 이는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와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라는 게송을 말한다. 여기서 지혜를 갖춘 자는 태어나기 전에 갖추어진 지혜로서 일종의 생이지라고 볼 수 있다.

 

지혜를 갖춘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를 갖춘자이다.”(Vism.1.7)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수행도 할 수 있고, 선정에도 들 수 있고, 깨달음에도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전생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수행을 한 사람이 이번 생에도 수행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칠세아라한은 가능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듯이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하나씩 다지고 올라가는 것이다.

 

다음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은 이번 생에 수다원이 되라고 한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한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전생부터 수행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생에 수다원이 되지 않으면 다음생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 있다. 준수다원(cūasotāpanna)이 되는 것이다. 이번 생에 준수다원이 되면 다음 생 한번만큼은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기본적으로 물질과 정신을 구별하는 지혜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계발된다. 이런 지혜를 알아 삼세에 대한 의혹을 극복하게 되었을 때이러한 앎을 갖춘 통찰수행자를 두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님, 발판을 얻은 님, 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님, 작은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Vism.19.27)라고 했다. 이번생에 이루지 못하면 다음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2019-12-15

담마다사 이병욱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무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0) 2020.01.18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0) 2020.01.12
원수를 알아 보세요.   (0) 2019.12.15
단번에 불음주계를 실현할 수는 없을까?  (0) 2019.11.23
신령한 한 물건  (0) 201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