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이 남자 배신 없었다면, 임진왜란도 없었다?

황령산산지기 2019. 12. 15. 06:22

 

 금화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천수각의 모습. 천수각을 조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점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일본어, 중국어(백화문, 한문), 한국어의 4개 국어로 된 '환영사'가 쓰여 있다. 한국어로 된 환영사의 내용은 '환영합니다 기후성에'이다. 환영사가 어째서 이런 비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 정만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를 이야기할 때면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이다.

오다는 임진왜란 이전의 약 100년 동안 일본 전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국 시대를 거의 평정한 인물이다. 그는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 1543~1616)과 더불어 '중세 일본의 삼영걸(三英傑)'로 불린다.

생몰 연도에서 대략 짐작되듯이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바로 앞의 일본 최고 권력자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바로 뒤의 최고 권력자이다. 즉 도요토미는 오다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다 아닌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것일까?

오다가 아닌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까닭

 기후성 천수각 안에서 보는 오다(왼쪽)와 배신자 아케치의 초상(일부)

ⓒ 정만진


오다는 통일을 목전에 둔 시점에 부하 장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82)의 모반을 막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信忠, 1557~1582)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아케치 모반군과 싸우다가 패해 자결했다. 권력은 마침내 도요토미에게 넘어갔다. 도요토미가 일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반란을 일으킨 아케치 덕분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케치는 '기후의 배신자'이다. 아케치가 모반을 하지만 않았어도 오다는 무난히 일본을 통일했다. 이는, 오다가 비명에 간 지 불과 몇 년 뒤에 그의 부장 도요토미가 100년에 걸친 전국 시대를 완전히 마감하고 일본 전역을 통일한 역사가 증언해준다.

즉, 아케치의 배신만 없었더라면 일본 전역을 통일한 거대 권력이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에게로 넘어가는 일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하 대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기후성(岐阜城)을 폐쇄해 버린다. 


오다 노부나가가 1567년부터 1576년까지 성주로 있었고, 그의 장남 노부타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다시 성주로 있었던 기후성을 도쿠가와가 아주 뭉개버리는 것이다.

도쿠가와는 왜 기후성을 그토록 무참하게 폐쇄해버렸을까? 기후성은 아버지 노부나가와 장남 노부타다만이 아니라, 1582년부터 1583년까지의 성주도 삼남 노부타카(信孝)였다. 심지어 기후성은 손자 히데노부(秀信)가 1592년부터 폐성이 되는 1601년까지 마지막 성주를 지냈던 성이다.


그만큼 기후성은 오다 가문의 애환이 서린 역사와 정치의 근거지였다. 그런데도 도쿠가와는 히데노부가 자신의 반대편이라는 이유로 기후 사람들의 자존심인 기후성을 없애버렸던 것이다.

아케치가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천수각 안에서 보는 오다 시대의 기후성 전역 그림

ⓒ 정만진


이 지역에 '기후'라는 이름을 붙인 이도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런 점에서, 100년 전국 시대를 거의 평정하여 천하 통일의 대권을 장악했던 오다는 기후의 상징 인물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그런 오다를 배신함으로써 기후가 중세 일본의 대표 도시로 발돋움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인물이 바로 아케치이다.

그런데 기후성 정상의 천수각(天守閣) 안에는 오다 노부나가만이 아니라 배신자 아케치의 초상화도 당당히 걸려 있다. 고구려로 친다면 남생의 초상화가, 조선으로 친다면 이완용의 초상화가 국립 박물관에 버젓이 게시되어 있는 꼴이다.


아케치의 배신이 없었으면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완수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기후는 중세 유럽의 대표급 도시로 부상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했을 터인데, 그 일을 가로막은 아케치의 초상화를 어째서 기후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걸어두었을까?

한편 의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까닭이 헤아려진다. 아케치가 오다를 배신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아케치의 초상화를 천수각 내에 걸어두지 않는다고 해서 그 당시의 역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기념관의 임무이다. 천수각은 기후성 기념관으로서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기후 시민들만큼 너그러울 수가 없다. 아케치가 오다를 배신하는 일만 없었더라면 임진왜란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역사적 가정에 빠진 까닭이다. 기후성 정상 천수각 안에서 나는 아케치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아케치의 모반이 없었으면 도요토미가 천하 대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반드시 통일 직후 도요토미처럼 조선을 침략했다고 볼  확실한 근거는 없다, 아케치만 아니었으면 임진왜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식의 허망한 역사적 가정에 하염없이 젖는다.

기후성에서 보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 더

 우리나라의 산신각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학력 향상, 입시 필승, 가내 안전, 결연' 을 기원하는 깃발들이 즐비하다.

ⓒ 정만진


기후성을 방문했다가 본 놀라운 광경은 아케치의 초상화만이 아니다. 성내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나라의 산신각과 유사한 작은 건물과 마주쳤는데, 그 앞에는 수십 개의 붉은 깃발들이 위엄을 뽐내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복은 주고 화는 막아주는 대왕"이라는 뜻의 커다란 복국마대왕(福?魔大王) 다섯 자 좌우에 부기되어 있는 기원 내용들이 눈길을 끌었다.'학력 향상, 입시 필승, 가내 안전, 결연' 이 네 가지이다.

가내 안전(家內 安全)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기도의 주제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결연(結緣)도 좋은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는 기원이니 인류 보편의 기복 신앙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학력 향상? 입시 필승? 이런 구호는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이 아니고서는 내걸리기 어려운 기도 주문이 아닐까 생각해 왔는데, 그것을 일본에서, 그것도 도요토미 유적지에서 보게 되다니!

건물 앞으로 다가서서 자세히 바라본다. 국마당(?魔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귀를 막아주는(?) 집(堂)이라는 뜻의 국마당 현판은 이곳이, 기도를 하면 나쁜 것을 물리칠 수 있고, 좋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기도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과연 앞에는 시주통이 놓여 있다.

시주통 아래에 놓인 나무상자 앞에도 구호 여럿이 붙어 있다. 순서대로 읽어보면 '입시 필승, 학력 향상, 상매 번성, 가내 안전, 교통 안전, 화도 난재' 여섯 가지이다.


자녀가 입시에서 반드시 뜻을 이루고, 학력이 향상되고, 장사가 잘 되고,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교통 사고를 당하지 않고, 화재와 도둑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원이다.

통일과 학문 숭상의 염원을 담은 이름 '기후'

 기후성 천수각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기후시 전경

ⓒ 정만진


오다 노부나가가 이 지역에 '기후'라는 이름을 붙인 때는 1567년이다. '기(岐)'는 고대 중국이 대부분 통일 상태로 들어섰을 무렵 당대인들이 진산(鎭山)으로 섬겼던 전설의 산 기산(岐山)에서 따왔고, '후(阜)'는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따왔다. 통일의 염원과 학문 숭상의 정신이 담겨진 지명인 셈이다.

하지만 공자의 곡부에서 '후'를 따왔기 때문에 '입시 필승'과 '학력 향상' 구호가 기후성 정상부에까지 휘날린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입시를 통한 개인 출세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후성 천부각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기후시의 풍경만은 가히 절경이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구에도 기후 사람의 유적이 있다.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뒤쪽 법이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수기임태랑(水崎林太郞)의 묘소가 바로 그것이다. 성씨 '수기'만 봐도 그가 기후 사람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향인 기후현의 기후정장(중심지 동장 정도)으로 있던 수기임태랑은 1915년 조선으로 건너온다. 이른바 '개척 농민'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수성들판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던 신천이 상수도 수원으로 변경되면서 농사 지을 물이 부족해졌다. 수기임태랑은 조선인들과 함께 수성못 축조를 위한 수리조합을 결성한다.

조그마한 자연 연못이던 수성못은 1927년 거의 지금의 형태로 개축된다. 수기임태랑은 그 이후 줄곧 수성못 관리자로 일하는데, 1939년 임종에 이르러 자신을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현재의 자리에 그의 묘소를 만든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침략군의 본부가 주둔했던 대구에, 수기임태랑 본인의 의도야 결코 그렇지 않았겠지만, 일본인의 묘소가 남아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들'을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다.

 수성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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