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인간에게 찾아오는 질병 '암'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매년 수천만 명의 사람이 암을 진단받는다. 평생 암 선고를 받을 확률은 30%에 이른다. 세 명 중 한 명이다. 암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질병이지만, 사실 아주 흔한 병이다. 왜 인간은 암에 걸리는 것일까?
환경 호르몬이나 공해, 식생활의 변화, 음주나 흡연, 운동 부족이 단골로 등장하는 암의 원인이다. 하지만 암은 그런 요인이 전혀 없어도 걸릴 수 있다. 평생 건강한 생활 습관을 철저하게 지켜온 사람도 암에 걸릴 수 있다.
암 발병의 상당 부분은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지만, 사실 유전적인 요인이 더 중요하다(감염을 제외하면). 물론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술·담배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진화적으로 암은 척추동물의 숙명이다. 수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포유류, 특히 영장류의 암 발병률은 그리 높지 않다. 백 마리 중 한두 마리만 암에 걸린다. 왜 하필이면 인간만 이렇게 암에 잘 걸리는 것일까?
암의 역사
인간은 암에 특히 취약하다. 세 명 중의 한 명이다. 왜 인간만 이렇게 암에 많이 걸릴까? 수명이 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끼리나 침팬지처럼 비교적 오래 사는 종도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
암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600년경에 작성된 고대 문서에 의하면 유방암을 묘사하는 글이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히포크라테스는 칼키노스(kalkinos)라는 병명을 붙였는데, 암 조직을 자르면 정맥이 사방으로 펼쳐진 모습이 마치 ‘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칼키노스는 그리스어로 게라는 뜻이다. 기원 무렵의 의사 셀수스는 그리스어의 칼키노스를 라틴어로 옮겨 캔서(cancer)라고 명명했다.
암(癌)이라는 한자 병명은 기원후 1181년 송나라 시대 의서인 위제보서(衛濟寶書)에 처음 등장한다. 병 녁(疒)에 바위 암(喦)을 합친 글자다. 하지만 암의 원인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는데, 치료도 제각각이었다.
셀수스는 수술로 절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갈렌은 수술보다 하제를 권했다. 암은 체액의 불균형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었고, 전염병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도 있었다.
혹시 인간은 처음부터 암에 취약하게 진화한 것이 아닐까? 현대인의 30%는 암에 걸리는 데다가, 기원전 기록까지 있으니 말이다. 2010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이집트 생의학 센터 로잘리 데이비드와 빌라노바대의 마이클 짐머맨은 아주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수천 년 전 이집트 미라 수천 구를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고작 다섯 구만 종양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게다가 악성 종양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집트 미라의 사망 당시 나이는 25세에서 50세 사이가 많다. 암은 고령에 빈발하므로 아무래도 악성 종양을 앓은 사람은 적을 것이다.
심각한 암을 앓았다면 미라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도 침팬지의 암 발병률을 고려하면 암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발암의 숙명
엑손 유전자의 약 1%가 암과 관련된다. 대략 350개 정도다. 세포 분열이 일어나면 DNA가 복제되는데 복제는 필연적인 오류를 부른다. 염기 하나가 잘못 복제될 가능성은 대략 1.8×10-8에서 2.5×10-8 수준이다.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누적되면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자연선택을 통해 오류를 찾아 수정하는 기전이 진화했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너무 완벽한 오류 검증 기전은 비용이 많이 든다. 게다가 가끔은 돌연변이가 환경 변화에 유용한 적응을 유발할 수도 있으므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이 일어났다.
타협의 결과 일부 개체는 암을 앓는 것이다. 세포는 분열해야 하고, 분열은 오류를 일으키고, 오류 수정 시스템은 모든 오류를 골라내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세포는 심각한 돌연변이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개체가 죽는 것처럼 세포도 죽는다. 어느 정도 복제를 반복하면 죽는 것이다. 복제를 많이 하면 암이 생기고, 복제를 적게 하면 일찍 늙는다. 역시 타협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분화되기 이전의 세포를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면 어떨까? 바로 줄기세포다. 하지만 줄기세포는 아주 많이 분열할 수 있으므로 암이 잘 생긴다. 상당수의 악성 종양은 줄기세포의 분열 과정에서 시작한다.
특정 조직의 줄기세포가 평생 분열하는 횟수는 암 발생률과 비례한다. 연구에 따르면 상관계수는 0.8을 넘는다. 토마세티와 보겔스타인의 연구에 의하면, 약 65%의 암은 확률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한다. 아무리 건강식을 많이 먹고, 깨끗한 곳에 살아도 소용없다.
이러한 암의 숙명은 인류의 수명이 길어진 탓인지도 모른다. 암은 나이를 먹을수록 발병률이 높아진다. 노인에게 더 비싼 암 보험료를 책정하는 이유다. 인구 십만 명당 암으로 인한 사망 건수를 조사해보면, 25세는 고작 10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75세에는 1000명이다. 무려 100배 증가한다. 연령이 증가하면 누적된 돌연변이도 많아지고, 환경적 발암 요인에 노출된 기간도 늘어난다.
게다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방어능력도 떨어진다. 암은 분명 진화적 트레이드 오프의 결과지만, 동시에 새로운 환경과 유전자의 불일치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비교하면 수명이 20% 이상 길다. 혹시 암 발병을 무릅쓰고 오래 사는 전략을 취한 것일까? 아직은 모른다.
암과 문명
인류는 암의 숙명을 타고난 것 같지만, 상당수의 암 발병은 환경적 요인이 관여한다. 1775년 영국 의사 퍼시발 포트는 굴뚝 청소부의 음낭피부암 발병률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영국은 주로 석탄을 사용하여 난방과 취사를 하고 있었다. 불을 때면 굴뚝에 검댕이 쌓인다. 긴 쇠줄이 달린 솔로 잘 닦아 내야 하는데, 굴뚝은 좁으므로 어린 소년이 주로 이런 일을 하였다.
5~6세 소년들은 굴뚝에 들어가 온종일 청소를 했고, 성인이 될 무렵에는 상당수가 음낭암에 걸려 죽었다. 하지만 퍼시발 포트는 발암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백 년이 더 지나 일본의 야마기와 가쓰사부로가 콜타르와 암 발병의 관련성에 대해 실험을 통해 밝히면서 굴뚝 청소부 소년의 비극의 원인이 밝혀졌다.
흡연도 대표적인 환경적 발암 요인이다. 담배 연기에 포함된 타르를 콜타르와는 조금 다르지만, 암을 일으킨다는 면에서도 같다.
물론 콜타르보다 담배에서 나오는 타르가 더 나쁘다. 술도 암을 유발한다. 알코올이 위암이나 식도암, 유방암과 관련된다. 짠 음식도 마찬가지다. 위암을 일으킨다. 자외선은 피부암을 일으킨다.
라듐, 엑스선, 플루토늄, 비소, 카드뮴, 감마선, 염화비닐, 석면, 미세 먼지, B형 간염 등… 사실 이런 식으로 발암 요인을 나열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인류에게 암이 많은 이유는 급변한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석탄이나 흡연, 충분한(?) 소금, 알코올, 라듐, 석면, 미세 먼지, 엑스선 등은 모두 최근에 인류가 접하게 된 물질이다.
일부 암은 기생충이나 세균, 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지만, 구석기 시대에는 이러한 전염병도 드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 밀도가 낮으면 감염병도 잘 퍼지지 못한다. 암은 척추동물이라면 다 앓을 수 있지만, 아마 문명이 시작된 후 폭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화적 견지에서 본 항암치료
암은 단세포 생물 시절에 가지고 있던 고대의 유산이 재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물의 진화는 몇몇 중요한 단계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데, 그중 하나는 복잡한 세포가 탄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세포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진화적 역사 동안 생물의 세계는 단세포 생물이 지배해왔다.
다세포 생물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일부 논란이 있지만 다세포 생물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캄브리아 대폭발 이후다. 생물 종이 폭증한 때를 말한다.
다세포 생물이 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개체를 이루는 세포 대부분이 그냥 번식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난자와 정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체세포는 적당한 때가 되면 죽음을 택한다.
암은 아마도 단세포 시절의 버릇이 재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부의 자극이나 유전자의 결함, 감염 등으로 인해서 스스로 번식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물론 암세포도 개체를 떠나면 죽어버리기 때문에(대부분은) 이런 전략은 자해 전략이나 다름없다. 암세포가 생각할 능력이 있다면 발암이라는 엉뚱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암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도 변이가 발생한다. 무제한 복제를 택한 암세포 사이에서 몇몇 다른 세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클론은 서로 경쟁한다.
아마 단세포 생물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지구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일 것이다. 혹시 이런 방법을 암 치료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항암치료를 감행하면 민감한 암세포부터 죽기 시작한다. 조금 성급한 의사라면 한꺼번에 암세포를 박멸하겠다는 일념으로 항암제를 왕창 투여할 것이다.
처음에는 효과가 좋아서 암 덩어리가 줄어들고, 이차적인 증상도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변이가 있는 클론 중에 내성이 있는 암세포가 이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원래의 지배자였던 치료 민감성 암세포가 사라진 곳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암은 다시 자라고, 이제는 항암치료도 소용이 없다.
최근 제안된 적응적 암 치료법에 따르면 가벼운 항암치료부터 개시한다. 하지만 치료 민감성 암세포를 완전히 박멸하지 않고 조금 남겨둔다.
치료 저항성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항암치료를 반복하면 종양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면서 계속 유지된다.
비록 완치에 이르지 못하지만, 암을 관리하면서 장기적으로 치료를 지속하는 전략이다. 아직 동물 실험이나 시뮬레이션 결과만 있는 수준이지만, 향후 연구 결과가 주목된다.
항암치료의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전이다. 엉뚱한 곳으로 암세포가 이동하면 참 곤란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진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세포 생물이 원거리 이동을 감행하는 것은 현재 사는 곳의 환경이 열악해지는 경우다.
종양이 커져서 암세포의 밀도가 높아지면 영양분과 산소가 부족해진다. 그러면 일부 클론은 이동을 결정한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먼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따라서 종양 덩어리에 산소를 공급해서 전이를 막는다는 것이다. 종양 덩어리에 산소를 공급하는, 직관에 반하는 치료 방법이다. 아직은 동물 연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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