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만든 '닥터 반지' 한국선 못낀다
스타트업들 해외로 엑소더스
지난달 29일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만난 의료 기기 스타트업 스카이랩스의 이병환(44) 대표는 반지처럼 생긴 의료 기기 '카트'를 보여주며 "혁신적인 의료 기기를 개발했는데, 국내에선 온전하게 쓰이지 못할 생각을 하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카트는 손가락에 착용하면 심장박동수 같은 생체 신호를 측정해 스마트폰으로 보내준다. 부정맥 같은 심장 이상 증상을 조기에 발견해주는 경보기인 셈이다. 최의근 서울대 교수는 "질병 감지 정확도가 98%에 달해 해외 유사 제품들보다 우수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반 시민이 카트를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집에서 카트를 사용하는 환자의 데이터를 관찰하는 것은 '원격 모니터링', 이상 징후를 감지해 환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원격 의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 다 국내에서 불법이다. 이 대표는 "내년 2월 국내와 해외에서 동시에 의료 기기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지만, 국내에서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했다.
국내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이 임상 연구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규제가 족쇄가 되고 있다. 국내 의료법에 따라 환자 원격 진료는 불가능하고, 의료기관이 아니면 유전자 검사 항목이 제한되며, 의료 관련 데이터는 관리와 사용이 모두 까다롭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의료 규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국내에선 '반쪽짜리 기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규제가 없는 해외시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쪽만 가능한 한국 아산나눔재단·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지난달 발표한 헬스케어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100대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63곳은 한국에서 온전한 사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격 의료(37곳), 의료 데이터(10곳), 유전자 검사(3곳) 등 관련 규제 때문이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한국은 의료 규제가 전 세계에서도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라며 "국내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한다"고 했다.
국내에선 새로운 의료 기기를 출시하려면 식품의약처로부터 의료 기기 인허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으로부터 신의료기술 평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급여 여부 평가를 모두 통과해야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이 과정엔 최장 390일이 소요된다. 정부는 지난 7월 이 과정을 80일로 단축시키겠다고 했지만, 시범 사업을 거쳐 내년 7월에야 본격적으로 시행될 전망이다.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한 혁신의료기술 육성·지원정책은 국회에 막혀 5개월째 진전이 없다.
창업 5년 차 스타트업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가정용 우울증 치료 기기는 국내 40개 병원에서 테스트하고 있다. 이 치료 기기는 환자가 머리에 밴드를 두르면 전류가 전두엽을 자극해 우울증 치료를 돕는다. 해외에선 이 제품을 집에서 사용하고 수집된 데이터를 수십㎞ 밖에 있는 의사에게 보내져 원격 진료와 처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에선 원격 처방이 불법이어서 가정에선 기기를 쓰더라도 의사 도움은 받을 수 없다. 이기원 와이브레인 대표는 "한국 출시 제품은 원격 처방 기능을 없앴고 사용자가 병원을 오가며 진단과 처방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유전자 검사 업체인 마크로젠도 국내에선 탈모·피부 노화 등 12가지 항목에 대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폐암·유방암과 같이 생명과 직결된 병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의료 기관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해외시장 찾아 엑소더스 스타트업들은 국내 규제를 피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외로 나간다. 스타트업 엠트리케어는 2020년 출시를 목표로 초음파 혈관 건강 분석 의료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이 제품은 처음부터 한국 출시를 포기하고 미국을 비롯한 해외시장 진출에 초점을 맞췄다.
박종일 대표는 “AI를 기반으로 혈관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와 사용자에게 혈관 상태를 알려주는 기기”라며 “정부에서 원격 의료로 판단하거나 데이터 규제를 위반했다고 지적할 가능성이 있어 국내시장엔 출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2015년 개발비를 모금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온라인을 통해 다수 투자자에게 투자금을 모으는 것)을 받았다가 식약처로부터 ‘미개발 의료 기기 성능과 디자인을 공개하는 것은 사전 광고 금지 규정 위반’이라고 고발당해 벌금을 물은 적도 있다.
1기 4차산업혁명위원회에 참여했던 박웅양 성균관 의대 교수는 “국민 건강과 관련된 만큼 모든 규제를 없앨 순 없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풀 수 있는 규제는 과감히 풀어줘야 헬스케어 성공 신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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