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과 불쾌는 어디서 온 것일까?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아니 몇 주째이다. 한달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불편과 불쾌는 마음속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나와 무관한 것임에도 관심을 가졌을 때 불편함과 불쾌감이 일어났을 때 나만 손해이다. 왜 그런가? 괴롭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계속 되었을 때 상대방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괴로운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두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처럼”(M20)하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혼란된 사유를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와 미혹으로 살아간다. 대상을 보았을 때 대부분 이 세 가지 중에 하나가 된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는 것이 탐욕이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것이 분노이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중립의 느낌이 된다.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탐욕이나 분노로 전환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분노의 뿌리는 어리석음에 있다.
대상과 접하여 탐욕과 분노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표출할 것이다. 억압하고 살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풀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는 불선법이다. 불선법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말한다. 욕망을 채우고 분노를 표출하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 되기 때문에 불선법이다. 불선과보를 받기 때문에 불선법이다.
신체적인 행위를 하면 살생, 도둑질, 음행으로 나타난다. 언어적 행위를 하면 거짓말이나 욕설로 나타난다. 신체적 언어적 행위로 이어지기 전에 버려져야 한다. 그렇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 따르면 다섯 가지 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
2) “그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이렇게
‘이러한 사유는 불건전하다.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
라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M20)
3)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말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M20)
4)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에 대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M20)
5)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려야 한다.” (M20)
다섯 가지 인상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인상(nimitta)이라는 말은 혼란된 사유를 제거하는 실천적 방법을 말한다. 첫 번째 단계부터 다섯 번째 단계까지 순차적으로 소개 되어 있다. 현재 단계에서 안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식이다.
제1단계, 쐐기의 비유
첫 번째 항을 보면 ‘쐐기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쳐서 제거하는 것이다. 커다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대하여 작은 착하고 건전한 사유로 부수는 것을 말한다. 탐욕이 일어났을 때 사띠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탐욕은 불선법이고 사띠는 선법이다.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선법으로 쳐내야 한다. 그래서 대념처경 심념처를 보면 “탐욕에 매인 마음을 탐욕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리고 분명히 안다.”(D22.19)라고 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탐욕을 탐욕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더 이상 탐욕의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라고 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M20)
제2단계, 사유의 위험을 새겨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너무 강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사띠해도 당해 낼 수 없다면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두 번째 항목과 같이 사유의 위험을 새기는 것이다. 탐욕이 너무 강하면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M20)라거나, 분노가 너무 강하면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M20)라고 성찰하는 것이다.
사띠라는 것이 반드시 관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제1의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해당된다. 탐욕이 일어 났을 때 “이것이 재난으로 이끄는 욕망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출가 했을 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Stn.424)라는 문구로도 알 수 있다. 또 ‘고양이의 경’(S22.10)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라는 것이다.
분노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A7.64)라고 했다. 분노가 일어나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탐욕과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부처님 말씀을 떠 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법이다. 사띠는 마음 부수에서 선법에 해당된다. 탐욕과 분노라는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재빠르게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하면 벗어날 수 있다. 불선법을 선법으로 부수는 것이다. 선법으로 불선법을 이전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이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자신에게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이렇게 ‘이러한 사유는 불건전하다.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라고 성찰해 보아야한다. 그가 이러한 사유 속에서 위험을 성찰하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M20)
제3단계,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탐욕과 성냄이 너무 강하면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제어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사띠를 하려 해도 사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불선법이 선법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때 불선업을 짓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아예 대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대상을 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처럼”(M20)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방법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 밖에 없고,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속에 탐욕과 분노가 일어났을 때 마치 뱀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것이다. 혐오스런 대상을 보았을 때 관심을 두지 않듯이,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것이다. 다른 대상으로 마음을 돌렸을 때 탐욕이나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이 그가 이러한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성찰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말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말아야한다. 그가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않고, 정신활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M20)
제4단계, 사유의 뿌리를 관찰해야
네 번째 방법은 ‘사유활동의 중지’에 대한 것이다. 대단히 고차원적이라고 볼 수 있다. 탐욕의 원인, 성냄의 뿌리를 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에 대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사유활동의 중지(vitakkasaṅkhārasaṇṭhānaṃ)’는 주석에 따르면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등의 질문함으로써 완성된다.”라고 했다.
욕정이 일어났다면 ‘욕정의 원인은 무엇인가?’ ‘욕정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며 따져 들어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있다면 역시 ‘분노의 원인은 무엇인가?’ ‘분노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며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들어가다 보면 욕정이나 분노의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왜 그런가?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초기불전연구원 주석에서는 “ ‘이 사유는 무엇을 원인으로, 무엇을 조건으로, 무슨 이유로 일어났는가?’라고 사유들의 뿌리와 뿌리의 뿌리를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는 말이다.”(MA.ii.92)라고 설명해 놓았다.
탐욕이나 분노는 불선법이다. 불선법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알아차림 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힘이 약하면 빠져 나올 수 없다. 로케트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과 같다. 이럴 때는 불선법이 왜 일어났는지 조사해 보아야 한다. 원인과 조건을 따져 보는 것이다.
특정한 대상을 보았을 때 탐심이 일어나거나 특정한 단어를 접했을 때 욕망이 일어난다면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것이 발현 되는 것이다. 과거 유년시절 욕구충족이 되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너무 자주 그 길로 가서 길이 넓어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탐욕이나 분노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즉시 제거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화살은 어디서 왔고 누가 쏘았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알려고 하기 전에 죽고 말 것이다. 이는 탐욕과 분노 그 자체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A5.161)라고 말씀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왜 그런 사유가 일어났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중지하는 것이다. 이는 사유(vitakka)가 형성된 것(saṅkhāra)을 멈추게 하는 것(saṇṭhānaṃ)을 말한다. 그래서 ‘사유활동의 중지(vitakkasaṅkhārasaṇṭhānaṃ)’라고 한다.
어떻게 멈추게 하는가? “이 사유는 무엇을 원인으로, 무엇을 조건으로, 무슨 이유로 일어났는가?”라며 사유의 뿌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뿌리에 뿌리를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탐욕과 분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안된다면 이를 꽉 깨물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이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않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았으나,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M20)
제5단계, 어금니를 물고 혀를 입천정에 붙이고
그래도 탐욕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후의 방법으로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댄다.”라고 했다. 이빨을 악무는 것이 연상된다.
어금니를 단단히 물고 입을 꼭 다물었을 때 불퇴전의 각오가 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항복받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항복받는가? 착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치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자를 머리나 어깨를 붙잡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것”(M20)과 같다고 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방법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이 그 사유에 대해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켰지만,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려야 한다.
그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M20)
사유중지의 달인
로케트가 날아 갈 때 중력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추진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탐욕과 분노의 제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선업에 굴복하는 것은 업력(業力)을 이겨내기 위한 힘이 약한 것이다.
힘이 있다면 마음관찰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부처님 말씀을 떠 올려야 한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관찰해야 한다. 최후 방법으로 이를 악무는 것이다.
어금니를 문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를 뜻한다. 더구나 혀를 입의 위천정에다 붙이라고 했다. 용맹정진의 기상이 엿보인다. 이빨을 악물고 혀를 위에 붙였을 때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탐욕이나 불선법이 거세게 일어났더라도 꽉 다문 입을 벌리게 할 수 없다. 탐욕과 분노와 같은 불선법을 조복받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로케트가 대기권을 벗어날 때 강력한 추진력을 필요로 하듯이, 수행자는 어금니를 꽉 물고 혀를 입천정에 붙여 업력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마음의 주인으로 살았을 때 ‘사유과정의 스승(vitakkapariyāyapathesu)’(M20)이라 할 것이다. 사유활동의 길에서 경지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 요즘 말로 한다면 ‘사유중지의 달인’이라고 할 것이다.
“마음이여, 어떠한 경우이든 그대의 말을 들었다.
다생에 걸쳐 그대는 내게 항복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생겨난 것은 그대의 은혜를 입었고,
나는 그대로 인한 고통속에서 오래도록 윤회했다.”(Thag.1132)
“예전에는 이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
좋아하는 것에 따라, 즐거움에 따라 떠 돌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이치에 맞게 제어하리라.
코끼리조련사가 미친 코끼리를 제어하듯.”(Thag.1136)
“그러나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코끼리몰이꾼이 미친 코끼리를 길들이듯.
나는 그대를 힘으로 나의 지배아래 두리라.”(Thag.1145)
2019-09-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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