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촌(청주)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 法頂
자객(刺客) 네 에미 애비를 벨 수 있느냐 그 모든 것 단칼에 자를 수 있다면 새 길은 언제나 무덤 위에 세워진다.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다." 먼저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을 갖고 나서, 그 다음에 그것을 안으로 또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 무릇 기상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거울에 오늘의 우리를 비춰봄으로써, 현재의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 고전을 읽는다. 따라서 생명력을 지닌 고전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예전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기상이 있었다. 컴퓨터를 갖고, 많은 자료와 정보를 갖고 그것을 처리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거의 모두가 기계화된 인간이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사나이로서, 학자로서,
선가(禪家)에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길을 내가 가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명 스님이 스승 서산 스님을 찾아 묘향산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현재에 사는 사람이 왜 옛길을 따르냐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밤잠을 안 자고 탐구할 때 그러한 기백과 기상이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상이 없다.
생각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이 다음에 써먹기 위한 수단으로, 과정으로, 출세길을 위한 방편으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나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학문을 한다면 그는 졸장부에 불과하다. 임제 선사의 어록(臨濟錄)에 보면 그러한 틀에 박힌 형식과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성인)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면 친척이나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리라." 하지만 임제 선사는 정신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 전통이나 스승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승자박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얽어매는 인혹(人惑)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붙들리고, 외부의 권위에 사로잡히면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린다. 그 때문에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또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을 뜻이다. 무위진인은 범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한다.
隨處作主(수처작주) 어디서나 자주적인 인간이 되라 立處皆眞(입처개진) 그러면 그 자리가 다 참되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
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 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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