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황령산산지기 2019. 9. 8. 07:06

설촌(청주)

    


 

  영원한 자유를 찾아서 / 法頂

           

   자객(刺客) 

   네 에미 애비를 벨 수 있느냐
   네 형제 자매를 벨 수 있느냐
   네 벗들과 연인과 이웃들을 벨 수 있느냐
   스승인 나 또한 벨 수 있느냐

   그 모든 것 단칼에 자를 수 있다면
   마지막, 너마저도 죽일 수 있다면
   그때야 네가 자객이다, 高手다.

   새 길은 언제나 무덤 위에 세워진다.


   다산(茶山)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다."

   먼저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을 갖고 나서, 그 다음에 그것을 안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 무릇 기상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거울에 오늘의 우리를 비춰봄으로써,

현재의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 고전을 읽는다.

따라서 생명력을 지닌 고전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예전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기상이 있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컴퓨터를 갖고, 많은 자료와 정보를 갖고 그것을 처리하느라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거의 모두가 기계화된 인간이다.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사나이로서, 학자로서,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드높은 기상을 갖기가 어렵다.

  

선가(禪家)에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丈夫自由衝天地 (장부자유충천지) 不向如來行處行 (불향여래행처행)"
대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있기에 부처와 여래가 가는 길이라 해서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길을 내가 가겠다는 것이다.
부처의 복제품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사명 스님이 스승 서산 스님을 찾아 묘향산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사명이 대답했다.
"옛길을 따라서 옵니다." 그러자 서산이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옛길을 따르지 말라. 오직 너의 길을 가라."

   현재에 사는 사람이 왜 옛길을 따르냐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밤잠을 안 자고 탐구할 때

그러한 기백과 기상이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상이 없다.

 

생각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이 다음에 써먹기 위한

수단으로, 과정으로, 출세길을 위한 방편으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기상이나 기백이 돋아날 리 없다.

사회적 신분이나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학문을 한다면 그는 졸장부에 불과하다.

   임제 선사의 어록(臨濟錄)에 보면 그러한 틀에 박힌 형식과
전통적인 인식을 강력히 부정하는 정신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조리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성인)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면 친척이나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리라."
  
   부처를 죽이라고 하면 타종교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화형감이고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을 당연시한다.
제자가 자신의 스승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 윤리로 보면 패륜아의 짓이다.

하지만 임제 선사는 정신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 전통이나 스승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그것은 자승자박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얽어매는 인혹(人惑)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붙들리고,

외부의 권위에 사로잡히면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린다.

   그 때문에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또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을
이야기했다.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위진인은 범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한다.
임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隨處作主(수처작주) 어디서나 자주적인 인간이 되라

立處皆眞(입처개진) 그러면 그 자리가 다 참되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왜 남에게 의지하고, 타인의 졸개가 되려고 하는가. 부처라 하더라도,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타인일 뿐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취를 통해서 오직 내 길을 당당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제자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스승에 대한 은혜 갚음이 된다.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재동자  (0) 2019.09.21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0) 2019.09.21
오시는 듯 안 오시는 듯  (0) 2019.09.01
분노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0) 2019.08.31
문제는 시간 지나도 해결 안되는 것들  (0) 201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