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잘못이 없다고?

황령산산지기 2019. 8. 31. 13:55

무엇이든지 꾸준히 하면 늘기 마련이다. 만시간 법칙이 있다. 하루 서너시간씩 매일 열정적으로 십년을 하면 누구나 프로페셔널(專門家)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천적 고음불가일지라도 노력하면 누구 못지 않게 노래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은 노래방 가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노래방 문화가 시작 되기 전에는 생음악으로 불러야 했다. 회식자리에서 돌아 가며 부를 때 참으로 난감했다. 무엇을 불러야 할지 몰랐다. 평소 듣기를 즐겨하지만 일어나서 부르라고 했을 때 그야말로 대략난감했다.

 

한때 십팔번을 만들고자 했다. 유행가 중에 성향과 잘 맞는 노래를 골라서 연습해 보는 것이다. 너무 고음이면 곤란했다. 노래를 해본 적도 없고 노래를 배워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회식자리에서 노래 부르기는 고역중의 고역이었다. 이런 고역은 노래방 문화가 확산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방에 따라갔지만 마치 꿔다 놓은 보리자루마냥 앉아 있기만 했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점차 음주가무를 멀리 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그렇다. 음주는 오계에 어긋나는 것이고 가무는 팔계에 어긋나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평소에 음주를 멀리 해야 하고 점차 가무도 멀리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차츰 지켜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오계는 학습계율이다. 처음에는 잘 지켜지지 않지만 이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학습효과에 따라 나중에는 점차 지켜지게 되어 있다. 음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느 때 끊을 수 있고, 가무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단절할 수 있다.

 

음주와 가무는 한마디로 즐기는 것이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술이 있는 곳에 노래와 춤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술은 아무리 마셔도 만족이 없다는 것이다. 만족이 없는 것으로 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인 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

 

 



경에 따르면 세 가지 만족 없는 것이 있다. , , 섹스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려 하면 할수록 갈증만 날 뿐이다. 누군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잘못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개나 돼지와 같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축생과도 같은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잘못이 없다라고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타락한다.”(A3.111)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감각적 욕망을 끊지 못하면 나쁜 곳, 지옥에 떨어진다.”(A3.111)라고 말씀했다.

 

술로 인하여 계행이 무너진다. 술은 만악의 근원이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만족이 없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급기야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린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음주가무일 것이다.

 

술이 있는 곳에 고기가 있고, 술이 있는 곳에 노래가 있다. 또 술이 있는 곳에 춤이 있다. 노래방, 단란주점, 룸싸롱 등에서는 술과 노래와 춤이 있다. 그런데 불교모임에서도 이와 같은 음주가무행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단체에서는 불음주계를 지켜야 한다. 공식적인 회식자리에서 음주가무가 있을 수 없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개별적인 모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 지키기 힘들어도 언젠가는 지켜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모임에서 술이 나오고 더구나 노래가 있다면 비난 받을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앙굿따라니까야 울음의 경에 실려 있다. 비록 출가수행자들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재가불자들에게도 때로 적용될 수 있다. 포살일에 적용된다. 또 수행처나 선원에 있을 때 적용된다. 그런데 재가자라도 수행자로서 삶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음주가무를 멀리 하게 된다.

 

경에 따르면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신세를 한탄하는 것 같은 울음이 된다. 춤을 춘다는 것은 미친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즐겁다고 하여 흰이빨을 보이고 웃는다면 장난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수행자라면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수행자가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은 경박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악작죄를 짓는 것이 된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무리 노래를 해도, 아무리 춤을 추어도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잘못이 없다는 사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시간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술을 잘 마셔도, 그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그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배려심이 있다면 술판으로 노래판으로 춤판으로 끌고 가지 말아야 한다. 술 못 마시고, 노래 못하고, 춤을 못 추는 사람에게는 음주가무 행위하는 곳은 너무 괴롭다. 분명한 사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잘못이 없다라고 여기는 사람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타락한다는 것이다.

 

 

2019-08-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