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권 받았다. 김진태 선생이 준 것이다. 책 제목은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운명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그래서 아모르 파티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가 된다.
책은 김진태 선생이 박재홍 선생과 함께 지은 것이다. 공동저자인 셈이다. 김진태 선생은 인문학자이다. 저자 소개란을 보면 인간행위의 심리적인 근원을 알고자 대학원에서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을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또한 김진태 선생은 수행자로서 매년 방학이 끝나는 12월이 되면 미얀마 수행센터로 떠난다고 했다. 햇수로 15년 째라고 한다.
김진태 선생이 지은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소설이다. 인문학자이자 명상수행자가 소설을 쓴 것이다. 김선생을 한번도 소설가로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강연하는 교수 또는 명상지도 하는 수행자로 생각했는데 소설을 냈다고 하니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책을 보니 분명히 저자가 김진태로 되어 있다. 박재홍 선생과 공동저자이긴 하지만 거의 300 페이지 달하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소설가로서 김진태 선생이라 볼 수 있다.
김진태 선생과 인연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때 당시 모선원 금강회에서 한달에 한번 김선생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10회 가량 들었는데 대단히 감명 받았다. 무엇보다 걸쭉한 입담이다. 청중들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때 당시 김진태 선생은 반야심경을 강연했다. 그런데 기존 방식과는 좀 달랐다. 김선생만의 독특한 해석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다 초기불교적 설명도 더 했다. 무엇보다 새로웠던 것은 미얀마 이야기였다. 김진태선생은 한국불교에서 해법을 찾지 못하자 미얀마 비행기를 탔다. 9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그때 김진태 선생의 강연을 듣고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씨가 되어서일까 11년이 지난 2018년 12월 31일날 미얀마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김진태 선생은 책을 건네 주면서 불교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불교냄새가 나지 않는 불교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모두 여덟 편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교적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경전문구는 보이지 않지만 불교적 가르침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예를 들어 데미안과 관련해서는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시스이다.”(80쪽)라는 인용구절이 있다. 여기서 아브락시스에 대하여 “아브락시스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참과 거짓 등 양극적인 것을 포괄하는 신입니다.”(81쪽)라고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설명했다.
분명히 불교의 중도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불교냄새가 안나게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모두 여덟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구미 장편소설에 대한 것이다. 인용소설을 보면 1)어린왕자, 2)데미안, 3)빨간 머리 앤, 4)호밀밭의 파수꾼, 5)주홍글자, 6)죄와 벌, 7)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8)안나 카레니나 이렇게 여덟 가지이다.
일부 영화로 본 것도 있지만 소설로는 읽어 보지 않았다. 이 중에서 소설 제목 ‘아모르 파티’와 관련 되어 있는 것은 다섯 번째 ‘주홍글씨’이다. 왜 하필이면 주홍글씨에서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말했을까? 이에 대하여 소설에서는 주인공 화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다.
“그러면 헤스터 프린은 어떻게 처신했는지 볼까요? 그녀는 자신의 간통에 대해 가혹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상대방을 자백하지 않고, 비난과 질타를 감수하며 간통죄에 대한 처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난 후에도 나머지 생애를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함으로써 그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랑했습니다.”(188쪽)
소설에서 가혹한 운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가혹한 운명에 접하게 되면 대개 전생의 업의 탓으로 돌린다. 또 한편으로 운명을 회피하여 자연인처럼 홀로 살아가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속의 주인공은 운명을 받아 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해 봉사와 헌신하는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부처님 가르침에도 볼 수 있다. 소설속에서 주인공이 가혹한 운명을 받아 들인 것은 자신의 업을 주인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했다.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 나려면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다. 남탓으로 돌리거나 회피하면 더욱더 악화 될 뿐이다. 악업에 대한 과보가 고통스러워도 선업을 지으면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소금덩어리 비유’가 적절하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M3.99)라고 말씀했다. 이와 관련하여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Yassa 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dhīyati;
Somaṃ lokaṃ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2)
사람들은 가혹한 운명을 한탄한다. 그것은 잘못된 만남일 수도 있다. 모든 괴로움은 접촉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할 수 없다. 수치심, 죄책감, 무기력, 두려움을 갖게 되면 삶의 질은 악화 되고 불선업만 쌓이게 된다. 최악의 경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가혹한 운명을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할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혹한 운명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의 선업과보가 되는 행위를 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十善業)를 말한다.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은 이 세상에 출현한 모든 부처님들이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했다.
김진태선생의 소설을 읽었다. 여덟 가지 에피소드로 된 것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여덟 가지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진태 선생의 소설은 불교적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가혹한 운명을 회피 하기 보다는 괴롭고, 슬프고,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다. 운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운명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2019-07-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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