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苦)를 보면 무아를 본다고 했을까?
“고(苦)를 보면 무아를 본다.” 이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마하시사야도가 읊었다는 위빠사나게송을 보면 “무상을 보면 고를 알고, 고를 보면 무아를 보고, 무아를 보면 열반에 확실히 정박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무상을 보면 고를 안다’라는 말은 이해가 된다. 경전에도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S22.15)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S22.15)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를 보면 무아를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른 새벽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괴로운 것은 무아일 수 있다.”라고. 왜 그런가? 그것은 좌선 해 보면 알 수 있다. 오랜만에 앉아 있다 보면 다리에 통증이 온다. 거의 99프로 오른쪽 다리이다. 평좌할 때 바깥쪽에 위치하는 다리를 말한다. 좌선한지 이삼십분 정도 지나면 다리 저림이 시작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한 통증을 수반한다. 너무 심해서 “이러다 불구되는 아냐?”라며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한번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면 견딜 수 없어진다. 두려움에 자세를 바꾸어 본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은 통증을 참으라고 말한다. 종 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증을 지켜 보라고 말한다.
통증은 수념처와 관련 있다. 괴로운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서 수온과 상온은 항상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통증이나 이미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따른 것이다. 통증이 심할 때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괴로워한다면 제2의 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육체적 고통이라는 제1의 화살에 이어 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제2화살을 맞은 것이다. 계속 괴로워한다면 무수한 정신적 화살을 맞을 것이다.
통증이 일어 났을 때 제2화살이라는 정신적 괴로움을 맞지 않으려면 관찰해야 한다. 마치 남의 다리 들여다 보듯이 객관적으로 통증을 지켜 보는 것이다. 이때 통증은 원인이 아니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괴로움이 결과라는 사실은 사성제에서도 알 수 있다. 사성제는 원인과 결과라는 2지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집성제이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고성제이다. 갈애에 따른 원인과 결과로서 나타나는 괴로움이다. 갈애는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오온에 대하여 집착된 것이 괴로움으로 나타난다.
통증에 대하여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단지 지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증을 지켜 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통증은 생멸한다. 생멸하는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 이것이 통증의 본래 성품이다. 통증은 내것이 아닌 것이다! 경전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라는 정형구가 잘 말해 준다.
불구가 될 것처럼 격심한 통증도 계속 지켜 보면 주기가 있다. 일파 다음에 이파가 오는 것 같다.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는 것도 같다. 때로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다. 나와는 무관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가 “고를 보면 무아를 본다.”라고 말했나 보다.
“현상이 일어나는 즉시 싸띠하면 본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본 성품을 알아야 생-멸을 볼 수 있다.
무상을 보면 고를 알고,
고를 보면 무아를 보고,
무아를 보면 열반에 확실히 정박한다.
열반을 보면 사악도를 영원히 벗어난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게송)
2019-07-12
담마다사 이병욱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운명을 사랑하라” 가혹한 운명에 대한 삶의 의지 (0) | 2019.07.20 |
---|---|
<정직과 청빈> (0) | 2019.07.14 |
현실은 업경대(業鏡臺) (0) | 2019.07.06 |
“사람은 스스로 제도하며 다른 이 교화도 가능한 존재” (0) | 2019.06.30 |
합장의 열가지 공덕 (0) | 2019.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