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

황령산산지기 2019. 6. 29. 16:27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

 

 

태어남이 있다면 죽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것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태어남만 있는 것 같다. 갓 태어난 새끼가 자라는 과정은 귀엽다. 그리고 사랑스럽다. 맹수라도 새끼일 때는 사랑스런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숫자만큼 죽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은폐 되어 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갓 태어난 토끼새끼들이 구물구물 거린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개새끼도 돼지새끼도 마찬가지다. 병아리도 그렇다.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라는 안타까움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를 해준다. 생일이 되면 해피버스데이(Happy birthday)’ 노래를 불러준다. 과연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 해 주어야 할 일일까? 태어나면 죽음이 있기 마련인데 죽음을 생각한다면 결코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빤딧짜스님은 저서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태어남은 곧 죽음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는 하면서도 죽음 축하합니다라고는 하지 않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똑 같은 것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11일간의 특별한 수업, 273-274)라고 말했다.

 

깨달은 사람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태어남은 축하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은 태어남에 대하여 괴로움으로 보았다. 부처님은 태어남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태어난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태어남에 대하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고 표현했다.

 

청정도론에서는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다. 입태에 대해서는 위장 아래에 직장 위에 복벽과 척추 사이에 극히 좁은 암흑의 여러가지 악취로 가득 차 있는, 심히 더럽고 혐오스런 자궁에서 마치 썩은 생선이나 부패한 죽이나 오물구덩이 등의 가운데 벌레처럼 생겨난다.”(Vism.16.37)라고 했다. 출산에 대해서는 업생적 바람에 의해서 회전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것처럼 두려운 산도를 향하면서 열쇠구멍으로부터 끌려나오는 큰 코끼리처럼, 압착되는 두 산 사이에서 가루가 되는 지옥의 뭇삶처럼, 극히 좁은 산문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이 출산 기인하는 고통이다.”(Vism.16.40)라고 했다.

 

청정도론을 보면 입태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태어나는 순간까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태아는 알지 못한다.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차츰 생겨나면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왜 자신이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태어나 보니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우연히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태어남은 다름 아닌업생(業生)’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업생적 바람에 의해서”(Vism.16.40)라고 표현 했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 보니 개였다면 개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토끼나 돼지, , 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태어난 이상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끊임 없이 먹어야 한다. 그리고 번식해야 한다. 본능에 충실한 삶이다.

 

사람도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축생과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의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번뇌와 망상만 일어날 뿐이다. 축생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일까 맛지마니까야 개의 행실을 닦는 자의 경’(M57)을 보면개처럼 소처럼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외도가 보기에 축생들은 번뇌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만약 개처럼 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산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소의 예를 들어서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소의 행동을 닦으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소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M57)라고 말씀했다.

 

태어남은 괴로움이고 태어남은 결국 죽음이라는 절망에 이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를 찾는 여행을 해왔다. 그 결과 갓난아기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이른바 천진불(天眞佛)사상이다. 간난아기에게는 번뇌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간난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의식도 없어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어느 수학자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라고 말했다.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업생이라고 하지만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인론자가 되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은 번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의식이 없으니 번뇌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악마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라고 속삭인다.

 

간난아기는 평화로워 보인다. 그렇다고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차츰 성장함에 따라 자의식이 생겨나는데 동시에 잠재된 성향도 발현된다. 청소년기에 나타난다는 이른바 2현상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무언가에 도취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유에 도취된 간난아기와 같은 것이다.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간 관념도 없다.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니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마는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라며 간난아기처럼 축생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라고 말한다.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기 마련이다.” 이 말은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한 말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가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가야 하리.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말씀했다.

 

머리에 불이 붙었다면 꺼야 할 것이다. 독화살을 맞았다면 먼저 뽑아 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사성제는 생멸에 대한 것이다. 생멸은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발생에 따른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지금 괴로운 것은 이전의 행위에 따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사성제에서는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결과인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개고라고 했다. 이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형성된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이라면 이는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을 바꿀 수 없다. 다만 관찰할 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을 말한다.

 

한번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태어남도 죽음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항상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오온이 단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임을 안다면 집착을 놓아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말씀 했다. 끊임없이 싸띠(sati)하는 것이다.

 

삶은 본래 괴로운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즐거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시적이다. 무상하게 변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생겨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변화하여 소멸한다. 변화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생멸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변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도취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점은 사유능력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일반사람과 다른 것은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도 자신을 제3자처럼 보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을 마치 남 보는 것처럼 바라 보는 것이다.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이다. 보긴 보되 세밀하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전념을 다 해 보는 것이다. 보다 보면 붕괴되고 사라져 버린다. 괴로움도 사라져 버린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M131)

 

 

2019-06-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