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과 슬픔에서 벗어 나고자
힘겨운 삶이다. 한발 한발 떼는 것이 몹시 힘겨워 보인다. 부축하는 사람이 없다면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 똑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이전에 만난 적 있을 것이다.
5월도 끝자락이다. 일터로 가는 길, 학의천 길은 눈부시게 빛난다. 하늘은 푸르고 온도와 습도는 적당하다. 연중 이런 날은 드물 것이다. 아무리 청명한 날도 사나흘 가지 못한다. 공기가 탁해져서 구름이 되고 비가 올 수 있다.
단지 순간을 보고 있다. 순간순간 변해 가지만 눈치채지 못한다. 시시각각 변해 가고 있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아. 좋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기억해 놓는다.
걸을 때 “왼발, 오른발” 하며 걷는다. 명칭을 붙여서 걸으려고 노력한다. 경행하는 것이다. 경행보다는 행선(行禪)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 하다. 어느 선생은 보수행(步修行)이라고 한다.
발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왼발, 오른발 하며 걷다 보면 목적지에 금방 이른다. 발을 드는 것에 마음을 두고, 발을 미는 것에 마음을 두고, 발을 디디는 것, 발을 바닥에 누르는 것에 마음을 두다 보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다. 일터로 가는 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왼발, 오른발 두 단계로만 해도 잡념이 사라진다. 어쩌면 생활속의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앉아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좌선 또는 좌수행이라고 한다. 서서 걷는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행선 또는 보수행이라고 한다. 수행이 좌수행과 보수행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수행은 명상홀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수행을 할 수 있다. 이를 행수행(行修行)이라 한다. 밥먹을 때도 수행할 수 있다. 밥을 입에 넣을 때는 “넣음, 넣음”이라고 마음속으로 명명한다. 씹을 때는 “씹음, 씹음”이라고 하고, 삼킬 때는 “삼킴, 삼킴”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아차림 하며 먹으면 천천히 먹게 된다. 그리고 맛을 음미하며 먹게 된다. 무엇보다 탐욕으로 먹지 않게 된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일상에서 수행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수행이다. 똥을 쌀 때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대념처경에서는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고,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D22.6)라고 했다. 심지어는 “가고 서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D22.6)라고 했다.
선원에서 들어가면 무엇이든지 천천히 하게 된다. 걸을 때도 뛰는 법이 없다. 뒤를 돌아 볼 때도 천천히 방향을 전환한다. 고개만 획 돌리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 밥 먹을 때도 천천히 먹는다. 모든 것을 천천히 한다.
선원에서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는다. 묵언하는 것이다. 말을 하면 모든 것이 깨져 버린다. 말을 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고,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실재하지 않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실재를 보기 위해 수행을 하기 때문에 개념으로 이루어진 말을 하지 않는다.
앉아서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고, 걸으면서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일상에서 이것저것 움직임을 관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실재를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개념이 아닌 실재를 말한다. 말이나 언어로 된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다. 노란꽃이다. 이럴 때 “꽃이 예쁘다.”라며 허리를 굽혀 살펴본다. 한번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세세하게 관찰한다. 매혹적 대상은 반드시 꽃만이 아닐 것이다. 여자가 될 수도 있고 남자가 될 수도 있다.
꽃을 보고서 “꽃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은 욕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욕망인줄 모르면 꽃을 세세하게 관찰하게 된다. 혼자 차지하고 싶어서 꺽으려고 할지 모른다. 꺽어서 화병에 넣어 혼자만 보려는 마음 때문이다.
욕망은 실재하는 성품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로서 로바(lobha: 貪)라고 한다. 성냄(dosa)도 자만(mana)도 질투(issa)도 후회(kukkucca)도 실재하는 성품이다. 이 밖에도 느낌, 자각, 의도, 부끄러움과 창피함 등 수 많은 성품이 있다.
성품은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에도 있다. 이를 사대라 한다. 땅, 물, 불, 바람의 요소 같은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모두 82가지 성품이 있다. 이를 궁극적 실재(paramattha dhamma)라고 한다.
궁극적 실재를 보는 것이 수행이다. 앉아서도 관찰할 수 있고, 걸으면서도 관찰할 수 있고, 일상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일반적 특징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앉아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풍대(風大)라는 성품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통증이 왔을 때 괴롭다면 느낌이라는 성품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성품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행하면 힘들다. 다리꼬고 앉아 있다 보면 통증이 발생한다. 복부의 움직임만 관찰하다가 이삼십분 지나면 다리가 저리기 시작한다. 점점 심해지면 더 이상 복부움직임만을 관찰할 수 없게 된다. 오로지 호흡만 관찰하는 사마타 수행자라면 통증은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을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관찰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가장 강한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리저림이 시작되면 복부에서 다리의 통증으로 관찰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다리에 통증이 왔을 때 가급적 자세를 바꾸지 말라고 한다. 보통 좌선시간은 한시간이다. 종 칠 때까지 버티라는 것이다. 버티긴 버티되 통증을 관찰하라고 한다. 통증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느낌은 다름아닌 성품이다. 느낌은 82가지 궁극적 실재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통증을 관찰하면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통증은 열반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한다.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 복부의 움직임도 관찰되지 않고 다리 통증도 없을 때 성품을 보기 힘들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수행자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고 한다. 일부로 통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 통증이라는 느낌을 통하여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 마음을 낸다면 ‘탐심’이라는 성품을 보게 된다. 상대방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면 ‘성냄’이라는 성품을 보게 된다. 발걸음을 경쾌하게 걷는다면 풍대라는 성품을 보게 된다. 부드럽거나 딱딱한 것과 접하면 지대(地大)라는 성품을 본다. 화끈거리면 화대(火大)를 본다. 그런데 이런 성품은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생멸하는 것이다.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다리꼬고 한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며 힘들다. 그럼에도 앉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빛을 보고자 함일까? 우주와 합일 되고자 앉아 있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당연히 성품을 보고자 함일 것이다.
성품을 본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멸현상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관찰하는 것일까? 대념처경에서는 신, 수, 심, 법이라는 네 가지 관찰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82가지 궁극적 실재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으로 구성된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6)라고 했다.
수행을 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빛을 본다든가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빛이나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면 집착이 될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 수행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성과 소멸이다.
생멸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성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탐욕이나 성냄 역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82가지 궁극적 실재 역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당연히 집착하게 않게 될 것이다. 탐욕에 집착한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결과는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성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이 탐욕과 성냄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탐욕과 성냄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이 아름답다.”라거나 “내가 화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실체도 없는 탐욕과 성냄에 매여 있다면 자아에 집착하는 것과 다름 없다. 탐욕과 성냄의 배후에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수행처에서는 항상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올바른 알아차림(sampajāna)은 실재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볼 수 있다. 궁극적 실재는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대상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올바로 알아차리면 성품을 볼 수 있다. 성품을 보면 생멸하는 것을 알게 된다. 생멸하는 성품은 무상, 고, 무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했을 때 갈애를 말하고, ‘이것은 내가’라고 했을 때 자만을 말하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했을 때 유신견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이 떨어져 나간다. 다리를 꼬고 힘들게 앉아 있거나 똑 같은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는 행선, 그리고 일상에서 주의 기울이며 천천히 행위하는 것도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D22.31)
수행을 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실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근심과 슬픔을 없게 해 주는 것이다. 특히 슬픔을 없애 준다고 했다. 수행을 하여 성품을 보게 되었을 때 무상, 고, 무아인줄 알아서 “슬픔은 나의 것이 아니고, 슬픔은 내가 아니고, 슬픔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사람들은 기뻐도 내가 기쁜 것이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그가 슬프다면 “슬픔은 나의 것이고, 슬픔은 나이고, 슬픔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으로 살아 갈 것이다. 그러나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이 떨어져 나간 자에게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수행을 하면 당장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시간 앉아 있으면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거나, 행선하면서 왼발, 오른발 하다 보면 근심과 슬픔이 끼여들 틈이 없다. 일상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면 더 이상 근심과 걱정, 후회,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2019-05-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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