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은 인간성을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감정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도 내려져 있지 않습니다. 과연 감정이 무엇일까요? 내적인 느낌? 혹은 표정이나 행동? 맥박이나 혈압? 뇌파의 변화? 모두 감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상태지만, 감정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상태를 일컫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확실하게 ‘느껴지는’ 정의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감정은 왜 있는가
감정은 아마 생명체의 탄생 초기부터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신경과 의사이자 뇌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감정이 가장 먼저 있었고, 이후에 모든 정신활동이 나타났다는 주장을 헸습니다. 물론 인간이 가진 복잡하고 세련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두 가지 상태를 이야기해보죠. 개체에 해를 입히는 부정적인 상황, 그리고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상황입니다. 전자의 예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포식자의 존재나 급격한 환경 변화, 먹이의 부족과 같은 외부 상태도 있고 질병이나 노화와 같은 내부 상태도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은 피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가장 원시적인 수준의 ‘부정적 느낌’입니다. 아마 주변에 먹이가 없을 때 ‘불쾌’하게 느낀 조상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다른 곳이라고 먹이가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기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유리한 상황’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환경이 안정적이며 위협적인 포식자가 없는 상태입니다. 내적인 항상성도 잘 유지되는 상태, 즉 건강한 상태라면 ‘긍정적 느낌’이 들 것입니다. 아마 이때 ‘유쾌’하게 느낀 조상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고 보다 나은 적합도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감정의 시작은 바로 부정적인 상태와 긍정적인 상태에 대한 내적 평가 시스템 및 이와 관련된 회피 혹은 접근 행동과 결부되어 나타났을 것입니다. 가장 원시적인 감정, 즉 공포다. 공포는 즉각적인 도주 반응을 유발하는데,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데다가 의지로 조절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뇌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현상은 유성 생식을 하는 동물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마 좀처럼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개체는 자손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감정은 생존 뿐 아니라 번식적 이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는 곤란합니다. 번식적 이득보다 ‘사랑에 속아’ 손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면서 다양한 감정은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나갔을 것입니다. 꼭 필요할 때 공포를 느끼고, 꼭 필요할 때 사랑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일이 간단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분명 감정은 기능적인 이점을 가진 적응적인 정신적 형질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타났고 진화했습니다. 하지만 생명체가 점점 복잡해지고 생태적 환경도 다양해지면서 감정도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진화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수천 개가 넘는데, 대부분은 환경적 맥락과 관련된 미묘한 감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티엘라델푸에고 제도에 사는 야간족의 말에는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며 망설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내는 간절한 느낌이나 눈빛’을 뜻하는 말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면서 아주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서로 충돌하고 부딪힙니다. 이럴 때는 이런 감정이 유리하고 저럴 때는 저런 감정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결하게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의심을 하고 미워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지고 무서우면서도 귀여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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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대로 감정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맛있는 딸기 케잌을 먹을 때도 기쁘고,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기쁘지만 그 기쁨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분명 비슷한 감정인데, 다릅니다. 아마 각각의 맥락에 들어맞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를 따로따로 만든다면 ‘마밀라피나타파이’같은 긴 단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과학자들은 우격다짐으로 감정을 분류해냈습니다. 대략 여섯 개 혹은 일곱 개 정도입니다. 원래 과학자는 감정이 좀 메마른 부류라서 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20세기 초반 행동주의 심리학자 존 브로더스 왓슨은 감정이 단 세 종류라고 주장했습니다.. 공포, 분노, 사랑입니다. 좀 과도한 것 같지만 그래도 과학자에게 감정의 분류를 맡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죠. 만약 시인에게 부탁했다면 아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감정의 목록을 만들어나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기본적인 감정은 공포, 분노, 기쁨, 슬픔, 혐오의 다섯 가지입니다. 여기에 경악을 넣으면 여섯 가지죠. 기쁨을 빼는 경우도 있습니다(슬픔의 반대일 뿐이니까요). 대신 사랑과 질투를 넣는 학자도 있습니다. 죄책감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록을 더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일단 그 일은 시인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죠.
앞서 말한대로 공포는 도주 반응을 유발합니다.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뛰며 신경이 곤두섭니다. 정신은 도망치려는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죠. 도저히 도망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공황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거의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활성화되는 감정 반응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분노는 공포와 반대로 공격성을 유발합니다. 소리치고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행동입니다. 후련한 느낌이 들지만 결과가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위협을 통해서 상대를 강압하려는 것입니다. 한번 불같이 성을 내면 주변 사람이 슬슬 눈치를 보게 됩니다. 물론 분노는 아주 ‘비싼’ 감정입니다. 주변 사람은 두려움에 굴복할 수도 있지만, ‘공포’를 느끼고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슬픔은 기쁨의 반대다. 우울한 마음이 들고 무기력해집니다. 새로운 일을 추구하려는 생각도 사라지죠. 자신과 세상, 그리고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또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내면으로 침참하는 동안 에너지를 비축하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햇빛이 줄어드는 겨울에 우울감이 심해지는 이유죠. 추운 밖으로 쏘다니는 것보다는 집안에 틀어박혀 겨울을 나는 것이 유리할 지도 모릅니다. 이불 밖은 위험합니다.
혐오는 좋지 않은 사물이나 사람을 피하는 것입니다. 오물을 보면 얼굴을 찌푸려지죠. 썩은 음식이나 더러운 장소는 꺼리게 됩니다. 감염을 막고 상한 음식을 피하는 것입니다.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만원 지하철을 타볼까요. 머리도 한 삼일정도 안 감는 것이 좋겠네요. 아마 홍해가 갈라지듯이 사람들이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혐오는 생존에 유리하지 않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만드는 적응적 기능이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지만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상대와의 결속을 돕고 양육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질투는 파트너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감정입니다. 모두 번식적합도를 향상시키는 유리한 정신적 형질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사랑이 깊으면 질투도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죄책감은 조금 논란이 있는 감정입니다. 수치심과 관련되기도 하는데, 자신의 행동을 반추하고 미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주는 기능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의 평판을 내재화시켜서 스스로의 행동을 검열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의 긍정성
감정의 종류를 이야기하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왜 대부분의 감정은 부정적일까요? 사랑이나 기쁨을 빼면 대부분 ‘없으면 좋은’ 감정입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민경환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나타내는 한국어 단어 중 72%가 불쾌한 감정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심해지면 병으로 취급됩니다. 우울장애나 불안장애, 공포증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적당한 수준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야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이라면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은 보통 ‘생존과 번식’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상황에서 촉발됩니다. 질투의 감정은 아주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파트너를 잃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공포는 분명 아주 불쾌한 감정이지만 그래도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좋은 일입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미리 막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와 마틴 헤이즐턴은 오류 관리 이론을 통해서 인간이 부정적 감정이 쉽게 시달리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손해가 막심하다면 작은 가능성도 미연에 예방하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종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어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식당에서 다른 여성을 슬쩍 훔쳐보는 남편. 아마 여성의 뒤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에 불쾌한 기분이 찾아옵니다. ‘혹시 저 여자에게 관심을?’ 짜증이 나고 괜히 화가 납니다. 급기야는 여자가 보이지 않는 테이블로 옮겨달라고 요청합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잘못 촉발된 감정임에 틀림없지만, 뭐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진화해왔습니다. 험난하고 거친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 했고, 사기와 거짓, 폭력, 기만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노심초사 고민하면서 조심조심 살아온 조상의 후손이 바로 우리죠. 우리 마음에 예민한 감정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온 것입니다.
불안과 부끄러움, 죄책감, 슬픔, 의존, 외로움, 사랑, 강박, 겸손 등입니다.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죠. 이유없이 쓴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면 그런 고역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대가라면, 설령 지금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조상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부정적 감정’이라면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도 좋지 않지만,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마음 속에 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감정이 주는 깊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메시지를 선택하고 어떤 메시지는 휴지통으로 던질 것인지는 각자 지혜롭게 선택할 일입니다.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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