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무한계율(無限戒律)에 대하여

황령산산지기 2019. 3. 24. 09:31

니까야강독모임이 시작된지 만 2년이 넘었다. 2017 2 11일 전재성 선생의 서고가 있는 삼송테크노밸리에서 처음 열린 이래 매달 둘째주 와 넷째주 금요일 열렸다. 이번 모임은 한달 보름만에 열렸다. 2월 한달은 전재성 선생이 하와이에 있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번역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율장의 다섯 번째에 해당되는 부기 번역을 완료했다고 한다.

 

3월 모임이 22일 저녁에 서고에서 열렸다. 이번 모임에서는 생활속의 명상수행법수 네 번째가 시작되는 날이다. 모두 열한 개의 법수로 되어 있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네 가지 법수는 중간쯤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성제, 사념처 등 숫자 4가 들어가 있는 법수를 말한다. 네 가지 법수의 모임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경이오랜 세월 유전윤회하며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시작 되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깨달음의 경’(A4.1)에 해당된다.

 

오랜 세월 윤회한 이유는

 

오랜 세월 윤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네 가지로 설명했다. 그것은 계율을 지키지 못해서, 삼매를 닦지 못해서, 지혜를 계발하지 못해서, 그리고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행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Ariyassa bhikkhave sīlassa ananubodhā appaivedhā evamida dīghamaddhāna sandhāvita sasarita mamañceva tumhākañca.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계율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A4.1)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했다. 여기서 윤회라는 말은 삼사라(sasara)를 말한다. 영어로는 ‘round of rebirth’의 뜻이다. 끊임 없이 재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윤회는 마치 굴러 가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sandhāvita’라 하여 유전한다(run through)’고 했다.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씻어주는 계온(戒溫)과 혜온(慧溫)

 

윤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경에서는 무명과 갈애 때문이라 했다. 무명과 갈애가 남아 있는 한 끊임 없이 윤회의 수레바퀴는 굴러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윤회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법을 부처님이 제시하였다. 그것은 계정혜 삼학이다. 그것도 고귀한(ariyā)’ 삼학이다. 고귀한 삼학을 닦으면 벗어날 것이라 한다.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고귀한 해탈(ariyā vimutti)’이라 했다.

 

삼학은 팔정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계온(戒溫)은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에 대한 것이고, 정온(定溫)은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에 대한 것이고, 혜온(慧溫)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팔정도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가장 먼저 혜온이 나오고 이어서 계온, 정온순이다. 이런 배열은 실수가 아니라 한다. 중요한 논리적 숙고에 따른 것이라 한다.

 

삼학에서는 계온이 먼저 나오고, 팔정도에서는 혜온이 먼저 나온다. 이와 같은 계온과 혜온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바라문이여, 손이 다른 손에 씻겨지고 발이 다른 발에 씻겨지는 것과 같이, 지혜는 계행에 의해서 씻겨지고, 계행은 지혜에 의해서 씻겨집니다.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습니다. 계행과 지혜는 이 세상에서 최상이라고 불립니다.”(D4.22)

 

 

손을 씻을 때 두 손을 비벼서 씻는다. 그렇다면 발은 어떻게 씻는가? 물론 손으로 씻을 수 있다. 그런데 발과 발로도 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년기 때 농촌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어른들이 논 일을 마치고 도랑에서 두 발을 비벼서 진흙을 씻어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혜와 계행은 두 손과 두 발과 같은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씻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계행에 의해서 씻겨지고, 계행은 지혜에 의해서 씻겨진다.’라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계행과 지혜에 대하여 최상이라 했다.

 

지혜로운 자의 계행

 

삼학은 계--혜 순이고, 팔정도는 혜--정 순이다. 계온과 혜온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다. 출발지가 종착지이고, 종착지가 출발지인 것이다. 그런데 정온은 중간에 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부처님은 계온과 혜온을 최상으로 보았다.

 

삼학이나 팔정도나 모두 원환적 고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계정혜 삼학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온과 혜온을 강조한 것은 두 온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계행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지혜가 있으면 계행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계율을 어길 때가 많다. 경제활동을 하면서 때에 따라 거짓말도 하는 것이다. 직원이 몇 명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두 명 또는 세 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혼자 일하지만 확인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직원 숫자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대응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 나서부터 솔직하게 말했다.

 

편법을 쓴 적이 있다. 업체의 요청에 따라 편의를 봐 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을 쓴 것이다. 그 사람의 요청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그만 두었다.

 

목전의 이익에만 눈이 먼 다면 불법과 탈법, 편법을 부릴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손해일 것이다. 그런 과보가 익어서 언제 불이익 당할지 모른다. 지혜가 있는 자라면 계를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해 주듯이, 마찬가지로 계를 지키면 계가 보호해 줄 것이다.

 

계를 지키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지혜로운 자는 계를 지키고, 계를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 볼 수 있다. 이런 지혜는 세속의 기준과 다르다. 세속에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한 자라도 그가 지혜로운 자라고 볼 수 없다. 계와 관련하여 지혜로운 자는 계를 어겼을 때 , 내가 지혜가 부족하구나!”라고 아는 자라 했다. 지혜로운 자가 계행을 지키는 것이다.

 

무한계율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우리가 윤회하는 것은 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계를 지키면 윤회를 끝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계는 오계나 구족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번뇌망상만큼이나 많은 무한계율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가불자가 지키는 계는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고 빅쿠가 지키는 구족계는 227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 말고도 무한개의 계율이 있는데 번뇌망상과 관련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구족계자가 지켜야 할 무한청정적 계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언급되어 있다.

 

 

구천 하고도 또한,

백팔십 꼬띠와

오백만 하고도 또한,

삼만육천이 있다.

이들 제어의 계율들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했고,

율장 가운데서는 생략을 통해

학습계율로 시설되었다.”(Vism.1.132)

 

 

청정도론에 따르면 구천백팔십 꼬띠의 계율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꼬띠(koi: 倶胝)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ten million’이라 되어 있다. 일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꼬띠는 사실상 무한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송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계율을 언급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지켜야 할 계율이 무한히 많음을 말한다. 번뇌망상 수만큼 지켜야 할 계율이 많다는 것이다.

 

망고나무 아래에 누워

 

빅쿠구족계를 받은 자는 227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지켜야 할 계율은 무한대에 가깝다. 번뇌망상수만큼이나 많은 계율이 있어서 이를 지켜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무한청정적 계율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띳싸장로의 계행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띳싸 장로가 찌라굼바에서 주석했을 때의 일이다. 장로는 모든 관점에서 믿음으로 출가한 총명한 행자라면, 삿된 구함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생활을 정화해야 한다.”(Vism.1.122)라고 믿고 있었다. 이른바 바른 생계를 말하는 것이다.

 

출가자에게 있어서 바른 생계는 탁발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 않는 것을 먹지 않는다. 어느 정도로 철저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웠다. 여기저기 많은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위에 있을 때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빠라맛타만주싸, 306번 각주)

 



 

장로는 배가 고파 망고나무 아래로 갔다. 망고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으나 먹지 않았다. 이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장로는 신도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열매를 따먹지도 않고 떨어진 열매도 먹지 않았다.

 

장로는 주지 않는 것을 먹지 않았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질에 해당되며 승단추방죄법을 짓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장로는 누군가 자신에게 보시 해 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지나가던 신도가 망고즙을 만들어 주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무한청정계율을 목숨걸고 지킨 결과

 

오후불식하면 열매도 먹어서는 안된다. 열매즙을 내서 마시면 된다. 장로는 신도가 열매즙을 만들어 보시한 것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 장로는 신도의 등에 업혀 가면서 보시의 대가로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해 주었다.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다.

계행을 지닌 자인 까닭에 그대를 위해

이와 같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외경을 일으켜서

이치에 맞게 사유하니

그대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Vism.1.133)

 

 

장로는 신도의 등에 업혀 가면서 아라한이 되었다. 무한청정계율을 지키면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 되기 때문에 거룩한 경지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지켜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건강한 사지를 위해 재물을 버려야 하고, 목숨을 수호한다면 사지를 버려야 한다. 사지와 재물과 목숨 그 일체를 가르침을 새기는 사람은 응당 버려야 한다.”(Vism.1.133)라고 했다. 목숨걸고 무한청정계율을 지켜야 함을 말한다.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다

 

버닝썬 등 세간을 떠들썩 하게 하는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보도 되고 있다. 모두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법으로 보호 되지 않는다. 법을 지키는 자는 법이 보호해 준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담마(Dhamma)라 한다. 담마를 한자어로 법()이라 한다. 그래서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 가르침이 잘 닦여지면, 공덕이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Thag.303)라고 했다. 법은 법을 따르는 자를 보호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넓은 의미에서 계율도 해당된다. 그런데 경장과 율장에 언급되지 않은 항목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에게 설한 것이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S56.31)라고 했다.

 

부처님인 설한 것 보다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설하지 않은 것은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다. 번뇌망상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번뇌망상이 많으면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번뇌망상을 없애야 하는데 번뇌망상 수만큼이나 많은 계율을 필요로 한다.

 

지혜로운 자는 계행을 지킨다

 

번뇌망상으로 인하여 유전하고 윤회한다. 윤회를 끝내려면 가장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오계부터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오계는 지키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오계를 지킨 과보에 따른 것이다. 오계를 어겨 목이 잘릴 때 다시는 오계를 어기지 않겠다고 맹세한 과보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오계를 어긴다면 지혜가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렇게 했을 때 존재의 갈애가 부수어지고 존재의 통로가 부서져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A4.1)라고 했다.

 

 

2019-03-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