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움츠러들고 치닫는 삶에 대하여

황령산산지기 2019. 3. 24. 09:30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윤회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 들인지는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2004년 이후 불교를 정식으로 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전에는 윤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조계종 종립학교 다녔지만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부처님의 일생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알고 나서부터 윤회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청소년기에

 

청소년기에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약한 심성이어서일까 걸핏하면 죽어버리면 되지라며 막연한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하다 안되면 그만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군대에 가면서 깨졌다. 훈련소에서 훈련 빡세게받다 보니 사치스런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한번도 막연한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갖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자리잡았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단멸론적 사고방식을 갖는 것 같다. 흔히 그들은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나는 거지.”라며 말한다. 이런 류의 말로서 돌아가셨다.”라는 말도 해당될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에도 해당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 졌음을 의미한다.

 

사대로 돌아 갔다는 말은 단멸론자들도 즐겨 하는 말이다. 상윳따니까야 견해로의 경에 따르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4.5)라는 말이 이를 말해 준다.

 

한국의 경우 종교를 가진자와 가지지 않은 자가 반반으로 갈린다. 종교를 가진 자의 상당수는 유일신교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원주의자라 볼 수 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자의 상당수는 단멸론자라 볼 수 있다. 오로지 불교만이 바른 견해를 가진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있는 그대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신의 한수

 

요즘 수행서적을 하나 보고 있다. 제목은 위빳사나 수행 28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간행된 것이다. 옮긴이는 케마 김도희선생이다. 금년 1월초에 미얀마에 단기집중수행하고 와서 수행기를 썼는데 그 과정에서 이 책을 소개 받았다. 마하시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하나인 참먜 사야도(우 자나카)가 법문한 것을 옮긴 것이다.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문구를 접했다. 사야도는 단멸론자의 견해를 인용하여 우리의 삶은 자궁과 무덤사이에 있게 됩니다.”(245p)라고 말했다. 단멸론자의 삶에 대하여 왜 자궁과 무덤사이에있다고 했을까? 그것은 단멸론자들이 죽음 이후의 내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은 사람이 죽을 때 육체적인 몸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흩어져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일생동안 임시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자아라는 것 역시 붕괴되어 소멸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그러면 죽음 이전의 삶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245p)라며 묻는다. 이 말이야말로 단멸론자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신의 한수와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자궁과 무덤 사이에 사는 단멸론자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imasmi sati ida hoti)”(S12.21) 라 했다. 그런데 이것과 저것은 ‘imasmi‘ida의 차이로 둘 다 영어로는 ‘this’라는 뜻이다. 둘 다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연기송을 보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 했다. 이어서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라 했다. 부처님의 연기송에 따르면 단멸론은 거짓이 된다. 왜 그럴까?

 

단멸론자들이 죽음이후의 삶은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연기송의 환멸연기로 부정된다. 용수는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사유체계를 부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중론은 사유체계를 부수는 테크’(2018-10-31)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논리 하나로, 중관학의 반논리학 ‘’(2018-10-18)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단멸론은 일반적으로 유전연기로 부수어진다. 그런데 중론에서 말하는 환멸연기로도 단멸론을 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는 단멸론자에게 찬먜사야도는 그러면 죽음 이전의 삶은 있겠습니까?”라며 역질문한 것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단멸론자에게 가하는 신의 한수일 것이다.

 

현재의 삶만 있고 죽음이후의 삶이 없다면 당연히 현재의 삶도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Imasmi asati ida na hoti)’라는 환멸연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의 삶에 대하여 자궁과 무덤 사이에있게 된다고 한 것이다.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있을 뿐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바르지 않은 견해에 속한다. 연기법적으로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삿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실제로 수행을 하면 모두 부수어진다는 사실이다. 좌선을 할 때 복부의 불러옴과 꺼짐을 관찰할 때, 그리고 행선을 할 때 걸음을 옮김을 관찰할 때 산산히 부수어진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움직임이 생멸하고, 관찰하는 마음 역시 생멸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그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다. 계속 조건발생하고 계속 조건소멸함을 말한다. 그래서 사야도는 그때 육체적 과정이 거기에서 멈춥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일어납니까?”(241p)라며 묻는다. 정신적 과정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복부의 움직임 위주로 관찰한다. 그런데 행선할 때에는 좌선과 달리 의도도 관찰대상이다. 발을 옮길 때에 의도가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는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집중이 깊어져야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의도가 일어나면 발이 들린다. 그런데 의도는 한번 일어난 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의도 역시 생멸한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행위의 주체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은 명색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게송을 소개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이 있을 때,

뭇삶이란 통칭이 있을 뿐이다.”(S5.10)

 

 

자동차가 모든 부품들로 결합된 것을 이름하듯이, 사람이나 중생 또한 오온의 결합물을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좌선이나 행선을 하여 정신적-육체적 현상, 즉 명색의 생멸에 대하여 알면 중생, 사람, 자아 등처럼 이름 붙여진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S5.10)라고 했다.

 

결국 괴로움을 소멸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 것도, 행선을 하는 것도, 일상에서 사띠하는 것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에 달려 있다.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정신적-육체적 생멸현상만이 발견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전우주에 오직 이 두 과정만이 존재합니다.”(221p)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라 했다. 그래서 하나가 사라져 버릴 때 다음 것이 일어나고, 그것 역시 사라지면 다음 것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243p)라고 말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깨닫는 지혜

 

가르침을 알아 실천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버려지게 된다. 이를 칠청정에서세번째 단계인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과 네번째 단계인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kakhāvitaraa visuddhi)’으로 설명된다.

 

좌선이나 행선을 했을 때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 역시 하나의 과정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주에는 오로지 두 과정만 남게 된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육체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어디에도 나, , 우리라는 개념이 들어 갈 수 없다. 당연히 영혼이 윤회한다거나 식이 윤회한다는 말이 나올 수 없다. 이는 견해가 청정해진 것이다. 이를 견해의 청정이라 한다. 그래서 16단계 위빳사나 지혜 중에서 첫번째 단계로서 이를 나마루빠 빠릿체다 냐나(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 하는데, 이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을 하여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된다. 움직임은 원인이고, 이를 관찰하는 마음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행선할 때 의도를 알아차렸다면 의도가 원인이고, 움직임이 결과가 될 것이다. 조건 없이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조건지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정신-육체적 과정을 알게 되면 사람, 개인, 영혼, 자아와 같은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생, 현생, 미래생 삼생에 걸쳐 영속하는 자아나 영혼 같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에 대한 의심이 극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의심의 극복에 대한 청정이라 한다. 위빳사나 16단계 지혜에서는 두번째 단계로서 이를 빳짜야 빠릿가냐나(paccaya pariggha ñāna)라 하는데, 이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를 깨닫는 지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yathābhūtadassana: 如實見)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가 생겨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물들지 않는다. 이는 연기법이라는 이론으로도 알 수 있지만 좌선과 행선, 또는 일상사띠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현생에서 내생으로 이동하는 영속하는 자아없이, 단지 원인과 결과로써 의존하며 멈추지 않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정신적-육체적 현상들만 있다.”(246p)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있을 때 뭇삶이니 개인이라는 명칭만 있고, 하나하나의 사실로 관찰할 때는 궁극적 의미로는 내가 있다.’라든가 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오직 명색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자의 봄을 있는 그대로의 봄이라 한다.”(Vism.18.28)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오온의 생멸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면 자아나 영혼 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하여 야타부따닷사나(yathābhūtadassana: 如實見)’이라 한다.

 

왜 움츠러들고 왜 치닫는가?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사라진다. 연기로 보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정신-육체적 과정과 원인-결과로 보면 삿된 견해는 발 붙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멸한다든가 단멸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불멸을 주장하는 영원주의자에 대해서는 움츠러든다가 말했고, 단멸을 주장하는 허무주의자에게는 치닫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움츠러들고 치닫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띠뿟따까 악견의 경’(It.43)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두 가지 악견에 사로잡힌 신들과 인간 가운데 어떤 자들은 움츠러들고 어떤 자들은 치닫는다. 그러나 눈 있는 자들은 본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자들은 어떻게 움츠러드는가?

 

수행승들이여, 존재를 즐기고 존재를 기뻐하고 존재에 환희하는 신들과 인간들이 있다. 그들에게 존재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면 마음이 용약되지 않고 청정해지지 않고 확립되지 않고 신해로 이끌어지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어떤 자들은 움츠러든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자들은 어떻게 치닫는가?

 

그러나 어떤 자들은 존재에 곤혹스러워하며, 참괴하며, 싫어하여 떠나서 이 자아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망실되고 파멸되어,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적멸이고, 이것이 최상이고,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하면서 비존재를 즐긴다.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어떤 자들은 치닫는다.

 

수행승들이여, 눈있는 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세상에 수행승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본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나서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져서 적멸에 든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눈있는 자들은 본다.”(It.43)

 

 

영원주의자들은 움츠러든다(olīyanti)’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물러가버린다라고 번역했다. 허무주의자들은 치닫는다(atidhāvanti)’라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넘어서버린다라고 번역했다.

 

영원주의자들은 존재에 대하여 왜 움츠러든다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떤 자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존재 가운데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 영원(sassata)의 존재에 어떤 신들이나 인간은 움츠러들고 퇴전하고 축소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ItA.I.178)라 했다. 사람은 신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이 모두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움츠린다라고 했을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존재에 대하여 왜 치닫는다라고 했을까? 주석을 보면 최상의 의미에서 자아와 세계는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존재의 소멸로 이끄는, 허무(uccheda)라는 앞과는 반대되는 원리로 치닫는다.”(ItA.I.178)라고 되어 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이라도 서슴없이 행할 것이다. 남에게 돈을 많이 빌려서 써 버리고 갚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마치 폭주하는 삶과 같다. 내일이 없는 삶이다. 그래서 치닫는다고 했을 것이다.

 

오온의 생멸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본다면 움츠릴 것도 치달을 것도 없을 것이다. 연기법을 아는 자에게는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겨난다. 이는 좌선과 행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신-육체적 현상을 관찰하면 중생이니, 사람이니, 자아이니, 영혼이니 하는 개념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로지 정신-육체적 과정과 조건에 따른 원인-결과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눈 있는 자(cakkhumanta)’라 했다.

 

눈 있는 자는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자이다. 특히 존재하는 것을 본다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bhūta)은 존재의 다발(五蘊)을 뜻하고 조건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최상의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불린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본다.’라는 것은 전도되지 않은 본성으로 본래의 특징으로 일반적 특징으로 본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이 무지 등이 그것들의 조건이다.’라고 이와 같이 조건을 포함하는 명색을 봄으로써 일체의 이러한 것들이 없던 것들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롭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다.’라고 무상에 대한 관찰 등으로 본다는 것이다.”(ItA.I.178)라고 되어 있다.

 

명색을 보면 없던 것들이 있게 된다라고 했다. 이것이 눈 있는 자들이 보는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원인과 결과를 깨닫는 지혜를 알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로 보았을 때 오온의 생멸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존재로부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이런 지혜가 생겨나야 적멸에 들 것이라 했다. 단멸론자가 말하는 죽으면 끝이다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와 의도가 내것이라면

 

영원주의자의 움츠림과 허무주의자의 치달음에 대한 설명은 청정도론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띠붓따까 주석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문제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위와 같은 이띠붓따까 악견의 경을 소개 하면서 꼭두각시의 예를 들었다.

 

꼭두각시는 나무와 실의 결합으로 된 것이다. 명색의 과정을 꼭두각시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존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명색도 공하고, 생명이 없고, 호기심이 없지만, 단지 상호결합으로 가기도 하고 호기심을 갖고 흥미 있는 것처럼 보인다.”(Vism.18.31)고 했다. 마치 오늘날 로보트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참먜 사야도는 정신-물질 과정에 대하여 로보트와 같다고 했다.

 

찬먜사야도는 의도에 대해서는 발을 드는 의도를 관찰하고 나면 발이 자동적으로 들려짐을 느낍니다.”(212p)라 했다. 만일 의도가 내가 내는 것이라면 자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유의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육체적 과정에서 의도나 의지는 일어날 때뿐이다. 그 관찰하는 마음 또한 일어날 때뿐이다. 그럼에도 끊임 없이 정신-육체적 과정이 진행되는 것은 연기법에 따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한다.

 

 

실제로는 여기 명과 색뿐이다.

여기에 뭇삶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꼭두각시처럼, 이것은 텅 빈 것()이다.

괴로움의 다발일 뿐, 풀과 나뭇등걸 같다.”(Vism.18.31)

 

 

2019-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