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삶의 정년은 있는가?

황령산산지기 2019. 3. 24. 09:29


어렸을 적부터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이후로도 그랬다.

같은 또래 보다 한살 많은 것이 평생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같은 나이 또래이다.

음력섣달로 민증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살 더 많이 먹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억울하게 한살 더 먹은 것이다.


나이는 보통 십년단위로 계산된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하는 식이다.

나의 십대는 어땠을까? 나의 삼십대는?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어서 되돌아 보니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헛되이 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출발해야 될 것이다.


직장에는 정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공무원을 제외하고 일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정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왜 그런가?

회사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생겨나고 하루에도 수없이 사라지는 것이 회사이다.

그러다 보니 정년까지 가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도중에 그만 두기도 한다.

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면 구성원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다 보니 정년은커녕 고용도 보장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용케도 정년까지 마치는 사람도 있다. 일반회사의 경우 오십대후반이 보통이다.

육십이 다 되어서 정년이 되었을 때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허탈해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든든한 울타리 안에 있다가 황야에 내 버려진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황야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야성(野性)이 없으면 살아 남기 힘든 것이다.


육십이 되면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환갑잔치를 했다.

정년이 되어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역시 다 산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인생 육십에 환갑이 있듯이, 인생 육십에 정년이 있다. 그렇다면 인생에도 정년이 있는 것일까?


인생에는 정년이 없다. 죽는 날이 정년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이야기하지만 기대수명까지 살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느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살 것이라고 보장해 주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불교적 관점으로 얘기한다면 이전에 지은 업(業)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업생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었을 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정년까지 살았다면 안락하게 산 것이다. 매월 고정 수입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밖에 나가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세상은 마치 세렝키티 평원 같은 곳이다.

굶주린 치타는 사냥을 하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

대상을 포착하면 있는 있는 힘을 다하여 폭발적 스피드로 낚아 채야 한다.

약자는 먹히지 않으려 한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달아나야 한다.


어느 번역가가 있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수십권의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

“제가 정교수가 되어서 안락한 삶을 살았다면 이와 같은 성과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헝그리 정신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본다.

정교수가 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전화위복일지 모른다.


회사를 이십년 동안 다녔다. 그러나 회사는 공무원과는 달라서 고용보장과 신분보장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수익을 내지 못하면 회사는 문닫아야 한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퇴출되기 마련이다.

사십대 중반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동안 수많은 회사를 전전했다. 한계에 이른 것이다.

황야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글을 썼다. 일인사업자이면서 동시에 블로거로서 삶을 산 것이다.


하루 일과중의 반은 글쓰기로 보냈다. 물론 인터넷 잡문이다.

학자들의 논문도 아니고 스님들의 법문도 아니다.

자영업자로 하루 하루 보내면서 느낀 것을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쓴 것이다.

그런데 13년동안 매일 쓰다 보니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 블로그 누적 조회수는 육백만명이 넘는다.


요즘은 검색의 시대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기만 글이 걸린다. 그래서일까 글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글 이야기를 한다. 처음부터 불교계 넘버원 블로그를 바라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삶의 결실일 것이다.

황야에 버려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년까지 안락한 삶을 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년까지 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사십대 중반에 황야에 버려진 것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일지 모른다.

지금 생각컨데 십년 앞당겨 삼십대 중반에 버려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매달 월급이 나오는 안락함에 빠져 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다.

더구나 정년까지 간다면 도취되듯 살아 갈 수 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월급의 몇 배 일을 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날 이런 행복과 번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안락한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안락한 삶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라(惡魔)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라고 속삭인다.


어린 아이가 누워서 우유를 마시고 포근한 요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자듯이

훌륭한 사람은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락한 삶은 우유에 도취된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은 마라의 말에 대하여 이렇게 반박했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가야 하리.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사람이 목숨이 짧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사람의 수명은 보장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년이 보장 되어 있지 않은 삶과 같다. 그래서 머리에 불난 듯 정진하라는 것이다.


머리에 불이 붙었으면 꺼야 할 것이다. 한시가 급한 것임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수행처에서는 좌선에 임하기 전에 예비수행으로 네 가지 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 자애의 계발,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 죽음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이 중에서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가 가장 와 닿는다.


죽음에 대한 숙고는 수행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경에서는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내가 먹은 음식이 탈이 나거나, 담즙이 나를 격분시키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해야 한다.”(A6.19)라 했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방에 훅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좌선 하기 전에 눈을 감고 먼저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고 숙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의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확실하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우유에 도취된 요람의 아기처럼, 알코올에 중독된 주정뱅이처럼 세월을 보낼순 없다.

어느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나의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직장에는 정년이 있을지 모르지만 삶에는 정년이 없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33)


2019-03-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