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잘 먹으려고 한다. 하루 세 끼는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끼니를 거른 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매일 세 끼씩 먹는다. 어제도 세 끼 먹었고, 오늘도 세 끼 먹고, 내일도 세 끼 먹을 것이다. 이 세상에 먹는 재미를 빼면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세상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하루를 사는 것 같다. 어디를 가든 먹거리는 넘쳐난다. 한끼를 배불리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을 마음이 없어진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주어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다. 먹은 것을 토해 내지 않는 한 먹을 수 없다. 그때는 눈으로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욕망은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눈이 있어서 보이듯이, 혀가 있으니 맛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각은 즐기라고 있는 것과 같다. 눈이 있는 것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귀가 있는 것은 듣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이다. 코도 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과 같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만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볼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눈이 생겨 나지 않았을 것이다.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귀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욕망의 세계, 욕계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색계에서는 시각능력과 청각능력만 필요할 뿐이다. 보는 능력과 듣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 냄새 맡고, 맛보는 능력, 접촉하는 능력은 필요치 않는다. 그래서 색계에서는 입으로 먹지 않는다. 먹지 않기 때문에 위장도 없다. 먹지 않기 때문에 몸이 가볍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날아 다닌다.
색계에서는 남녀를 구분하는 성기능이 없다. 욕계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능력이 있어서 남녀가 구별되지만, 색계에서는 시각과 청각능력만 있기 때문에 성의 기능이 없어서 남녀 구별이 없다. 욕계에서 욕망충족으로 사는 사람들은 색계에 가면 낙이 없을 것이다. 먹는 재미도 없고 성적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의 세상도표를 보면 욕계천상이 있다. 욕망이 극대화 된 곳이다. 그런데 욕망의 세계, 욕계에서는 오로지 욕망충족의 욕구만 있을 뿐이다. 욕계에서는 수행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욕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오욕락을 억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 했을 때 다섯 가지 감각능력은 상실 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팔정도에서 ‘올바른 집중(正定)’에 대한 것을 보면 가장 먼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라는 정형구가 등장한다. 이 말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 즉 눈과 귀, 코, 혀, 몸으로 즐기려는 욕망을 말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욕계를 벗어나 선정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선정에 든다는 것은 범천의 색계에 드는 것을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를 합하여 범천이라 한다. 또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삼계를 탈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 불교수행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다리 꼬고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서 수행은 고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망의 세계를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오욕락을 즐기는 자에게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은 쇠귀에 경읽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오욕락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에 난감 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 하기 힘드네.”(M26.29)라고 탄식하듯이 말했다.
세상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 간다. 이는 다름 아닌 본능대로 살아감을 말한다. 동물적 삶과 다를 바 없다. 본능대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본능대로 살지 말라’고 말했을 때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힌 탐욕의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M26.29)라 한 것이다. 욕망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불교가 매력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욕망을 거슬러 가는 것이 가르침이라 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특히 수행이 그렇다. 내면에 대상을 집중하면 욕망, 성냄 등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된다. 그래서 욕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세계에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 이는 팔정도 올바른 집중에서 잘 묘사 되어 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색계로 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기쁨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하늘을 날아 다닐 수도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 잘 묘사 되어 있다.
오늘도 한끼의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을 먹고 나면 포만감을 느낀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허기가 지면 또 먹어야 한다.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 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끼 먹기도 힘들게 사는 사람은 매번 끼니 걱정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끼니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삶을 말한다. 이에 대한 실천이 오후불식(午後不食)일 것이다.
일요일 오전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는 사람들이다. 현대인들에게 일요일은 쉬는 개념이긴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교회 가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모든 행사는 토요일에 몰려 있는 것 같다. 일요일은 교회 가는 날로 암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듯 하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일요일 오전현상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불자들은 거의 절에 가지 않는다. 절이 집 가까이 없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절은 산중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보니 절에 갈 일이 없다. 대부분 불자들은 일요일 집에서 쉰다고 볼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은 종교시설에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기독교인들은 상당수가 매주 일요일 교회 가는 것을 빼먹지 않는다. 불교인들도 절이 멀리 있더라도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요즘에는 도시에도 수행처가 많이 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다. 절이나 수행처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포살계를 지키는 것이다. 여덟 가지 항목을 지키는 삶을 말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출가자처럼 살아 보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오후불식이다.
일요일 오후불식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가장 먼저 욕망을 누를 수 있다. 일하지 않는 일요일임에도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습관적이고 욕망으로 먹는 것이 된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속을 비워 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오후불식 이점에 속할 수 있다. 이렇게 오후에 먹지 않으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청정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포살계는 오래 전부터 지켜 왔다는 것이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원래는 보름마다 포살계를 지켜야 한다. 오늘날에는 주칠일제이기 때문에 일요일에 지키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기독교인들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서 회개 하듯이, 불교인들도 일주일에 한번은 절이나 수행처에 나가 욕망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포살계를 부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불교인들도 일요일은 절이나 수행처에 나가서 법문을 듣고 오후에는 포살계를 지키는 삶을 산다면 오늘날 종교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지켜 나갈 것이라 본다. 그 첫 번째가 일요일 오후에 불식하는 것이라 본다.
2019-03-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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