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신론 - 부처의 참모습, 이 세상은 삼사라의 세계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져서 마치 술 취한 자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수행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봐야 한다.
먼저 그대의 논리적인 사고를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은 각자가 얼마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진지한지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대를 막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삶은, 그대의 눈동자와 행동은 그 사실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대 주위의 모든 것이 그대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도 그대를 돕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겨우 몇몇 사람을 인도할 것이다. 그것도 잘못된 길로 말이다. 그리고 그 몇몇 사람을 얻는다면 그대는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그런 바보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바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서 그대는 자신이 확실히 깨달았다고 믿기 시작한다. "내가 깨닫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현명한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업이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책임은 없다. 항상 기억하라. 한 순간도 잊지 말라. 그대 자신이 아닌 것을 결코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며, 거기서 빠져 나오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심이 됩니다. 왜 누군가 그의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무심을 보지 못합니까?"
무심(無心)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무심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상품도 아니며 어떤 대상도 아니다. 무심은 텅 빈 허공이다. 그것은 침묵이다.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것을 절대적인 침묵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침묵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소리도 그대는 거기서 들을 수 없다. 그대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침묵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고통이나 긴장, 근심, 걱정을 느끼지 못했을 때 그것을 축복의 상태라고 경험하는 것과같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은 아니다. 무심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마음이라고 어록에 나와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무심이라고 바꾸었다. 마음은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매일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어야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그대는 그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눈만 감으면 그것은 언제든지 나타난다.
"그러나 그 무심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달마의 대답을 이해하려고 그 제자는 질문을 한다. 그는 틀림없이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했다.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무심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가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텅 빔이기 때문에 그대는 보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공(空)'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제자는 다른 말로 바꾸어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이, 아니 무심이 있다면 왜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합니까?
그 다음은 그가 달마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잊어버린 것같이 보인다. 질문은 거기에 있지만 답은 아무 데도 없다. 하지만 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답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래서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눈동자 외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대 자신의 손을 빼고는 이 세상 무엇이든지 손으로 만질 수 있다. 그처럼 무심이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이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것과 함께 살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것을 노래 부를 수 있고, 춤출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대답이 될 수 있지만, 기록될 수는 없다. 그래서 달마는 제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그러나 여전히 그 제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만 한다.
"예,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달마나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말이다. 내가 어떻게 꿈이 될 수 있는가? 꿈은 내 앞에서 떠다니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나는 보는 자이고 그것들은 보여지는 대상이다. 나는 아는 자이고 그것들은 앎의 대상이다. 나는 주체이고 그것들은 객체이다. 그래서 그 제자가 올바르게 대답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대와 어떻게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그대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깨어있을 때의 행동과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대의 행동이 그대 자신은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 자체는 아니다. 그대의 의식이 걷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걷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더라도, 그대의 의식은 항상 변함 없이 그대 내면에 존재한다.
그래서 정확한 대답은 이렇게 말해져야 한다. "예, 그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행동이 나 자신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항상 지켜보는 자로서 나의 행동 뒤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초월한 지켜보는 자입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렇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의식이다. 그대의 행동이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무심인 것이다. 그대의 몸은 그대가 죽고 나면 화장터에 가서 재로 변한다. 하지만 그대는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체를 얻게 된다. 그래서 달마는 계속 말한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무심이다. 이 무심은 시작도 없는 영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죽거나 새로 생기지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행이나 악행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대의 몸은 여러 번 죽고 또 죽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은 그대의 무심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바닷물은 어디에서 맛보아도 그 맛이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대의 진짜 몸이 그대의 진정한 존재이다. 바로 진신(眞身)인 것이다. 여러 가지 몸을 받더라도 그대의 진신은 변함이 없다. 지금 그대의 몸이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대의 진신은 그런 구별이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벽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 윤회)의 강을 건너간다.
여기서 오대의 산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를 말한다. 그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소위 그대의 몸이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제각기 흩어져도 그대의 진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장애를 초월해서 진정한 집에 이른다.
이 세상은 삼사라의 세계이다. 삼사라는 윤회의 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강조차도 그대의 진신은 궁극의 집에 도착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궁극의 집은 그대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그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단지 그대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어떤 업도 이 무심을 제한할 수 없다. 이 무심이 진신(眞身)이며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인 마음과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무심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무심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비록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갖고 있다. 그대는 그 빛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그대의 삶이 그대의 무심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이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그대는 살고 있다.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대에게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혹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훌륭한 요리를 맛보고서 사람들이 그 맛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길은 물은 사람이 직접 맛보는 길밖에 없다. 거기에 어떤 설명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내면에 있는 이 부처를 왜 알지 못하는가? 왜 그대는 꼭두각시인 채로 남아 있는가?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조금만 흔들어도 그대 내면에 있는 자신이 깨어날 것이다.
모든 명상이 바로 깊은 영적 잠에 빠진 그대를 흔들어 깨우려는 수단일 뿐이다. 오스펜스키(P. D. Ouspensky)는 그의 저서 《기적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를 그의 스승 게오르그 구르지예프(Geroge Gurdjieff)에게 헌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잠을 깨운 분인 게오르그 구르지예프에게."
이것이 바로 스승의 역할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를 깨우는 것이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어디로 갈 곳도 없고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대는 이미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다. 그대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대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찾는 행위는 미혹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 자신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대 자신을 벗어나게 하라. 모든 에너지를 그대 자신에게로 집중하라. 구르지예프는 그것을 '결정화'라고 불렀다. 구르지예프는 바로 달마와 같은 사람이다. 만약 달마와 같은 사람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구르지예프를 말할 것이다. 달마가 그대의 불성을 깨우라고 말했다면, 구르지예프는 그대의 존재를 결정화시키라고 말했다.
이 어록을 읽으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그것은 여기저기에서 잘못 쓰여진 부분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 오류들은 깨달은 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토록 무작정 쓰여진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것들은 올바르게 고쳐져야 한다.
그래서 나의 주석은 아리송하고 틀린 것 모두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나는 이 어록을 달마의 완전한 육성으로 고치고 싶다. 다른 제자들의 어떤 편견도 물들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항상 있어 왔다.
예수의 복음도 3백 년이 지난 후에 쓰여졌다. 그때 이미 예수의 진짜 복음은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인은 아무도 또 다른 예수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복음을 고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고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경전은 그가 죽자마자 씌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불경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고 나서 백 년도 못되어 32개의 학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제각기 달랐다. 석가모니 부처의 말에 대해서32가지 주석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는 잘잘못을 고쳐줄 수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명확함이 마음을 초월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혼란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심은 명확한 것이지만 마음은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심에서 나온 침묵은 그대에게 명확함을 선사한다. 그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즉시 알 수 있다. 그것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이 어록을 읽으면서 나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해서 한 순간도 머뭇거리거나 숙고하지 않았다. 잘못된 부분은 내가 보는 순간 즉시 나타났다. 거기에는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이 어록을 보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모든 고대 경전들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수정도 없이 몇 천 년씩 그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이 올바로 고쳐져야 할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광신적이고 깊이 빠져 있어서 어떤 변화도 원치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수정한 부분은 불교도에게는 환영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 그들은 내가 마음대로 경전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어록의 몇 부분이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책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었고 엉터리 주석들이 덧붙여져서 결국 혼란만 더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이 어록을 하나의 완전한 철학으로, 논리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나 역시 고대의 경전들을 고침으로 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물론 나는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래 세대에 출현하게 될 새로운 인간은, 전 세계가 한 사람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 그에게 적어도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를 정확히 가려 놓았기 때문이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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