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복은 스스로 짓는 수행의 삶에서 비롯돼

황령산산지기 2018. 9. 16. 15:39
      1. 복(福)의 정의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복(福)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생활사 주변에서 복과 관련한 수많은 용어들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불교 또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복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한다. 사실 초기불교경전에서부터 복은 매우 중요한 말로 많이 설해지고 있다. 중아함의 《우분유경(牛糞喩經)》에 의하면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나는 옛날을 기억할 때, 긴 세월 동안 많은 복을 짓고 그러한 오랜 복을 지은 뒤에는 길고 많은 즐거움의 과보를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복경(福經)》에는 복에 대한 교설이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복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복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복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즐겁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라. 마음으로 늘 생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복이 아닌 것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동안 작복(作福)하여 오랫동안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으로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다른 경전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복보(福報)를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즐거움을 받는 응당함이어서 깊이 사랑하고 공경할 만한 것이다. 복이라 이름하는 까닭은 이렇게 큰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괴로움의 근본으로서 슬픔과 근심의 번뇌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사랑하고 즐거움이 없기에 무복(無福)이라한다. 이렇게 복의 개념은 설하는 한역 경전에 대한 빠알리 대응 구절은 찾아 비교하여 볼 때에도 복의 개념은 다름 아닌 즐거움(樂)에 대한 다른 말로 쓰이는데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 말라. 즐거움은 다름 아닌 복행을 이름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오랜 동안 복을 지어 숙성시키고 꽃이 피어 복락을 누렸는데 그것은 즐겁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는 다시 다섯 번째 니까야의 한 경인 Itivuttaka에 다음과 같이 좀 더 부연된다.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 말라. 즐거움은 다름 아닌 복행을 이름 한다. 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끌리는 바이며, 사랑스럽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오랜 동안 복을 지어 숙성시키고 꽃이 피어 복락을 누렸는데 그것은 즐겁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같이 복은 애락이나 쾌락인데 반해 비복(非福) 또는 무복(無福)은 고(苦)임을 뜻한다. 《증일아함》에서도 분명히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 복은 쾌락이고 무복은 고이다. 현세와 후세에 복 지어 낙을 받는다”가 그것이다. 위의 경전들은 모두 이 같은 복락이 있기까지 7년 동안의 자심(慈心)을 닦는 과보로 설명된다. 즉 자심 수행은 복인 또는 복행이고 그에 대한 과보는 다름 아닌 복과(福果) 또는 복보(福報)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역 경전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복(福)의 원어는 무엇인가. 산스끄리뜨에서는 puṇya와 그리고 빠알리는 puñña로 나타난다. 한역 과정에서 ‘선’(善)이나 ‘공덕’(功德) 또는 ‘복덕’(福德) 등의 역어도 복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옮겨졌다. 불교에서 의미하는 ‘복’은 원인적인 것에 따른 결과로서 좋은 과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좋은 과보를 가져다주는 원인으로서의 현재의 선행 자체도 ‘복’으로 보고 있다. 즉 미래에 복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로서의 복인이나 복행 또한 ‘복‘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이 바탕 되어 있지 않으면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짓는 복행(福行)은 복인이면서 동시에 복과(福果)이다. 이는 업보의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는데 업보에서 보를 과보(果報)라고 할 때 업은 결과인 열매(果)의 씨앗이다. 그런데 열매는 곧 씨앗이 될 수 있고 씨앗은 결국 열매를 맺게 하는 이치와 같다. 불교에서 복을 정의하는데 ‘선’이나 ‘가치 있는 행위’ 그 자체로 쓰는 경우는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에 대한 또 다른 복이고 또 다시 미래에 좋은 결과를 뒤따르게 할 수 있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2. 복업(福業) : 복 짓는 행위 부처님은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무덤으로 가지만, 그러나 단 한 가지 믿을 만한 것은 복 뿐이라고 하여 늦어 후회하지 말고 여러 방법으로 복업을 닦기를 권한다. 또 다른 경에서는 복은 재물과 달리 도둑이나 왕에게 빼앗길 수도 없는 것이고 불에 타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바로 보시의 복업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악마도 깨뜨릴 수 없는 것이기에 복 짓는 행위를 결코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로 설법 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너무 열심히 정진한 나머지 결국 눈이 먼 아나율 제자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하고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자는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 달라”라는 소리를 듣고 몸소 꿰어 주면서 복행이 설해지고 있다. 여기서 “여래는 다시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복에 있어 으뜸 되기를 구하시느냐”라는 아나율의 질문에 부처님은 복 짓는 복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른다. 첫째는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요, 셋째는 참는 것이요, 넷째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계속해서 경의 말미에 이 세상에 복력(福力)이 가장 뛰어나고 더 나아가 그 복력으로 성불(成佛)하게 되었다는 강조로서 경을 맺는다. 복업을 닦아서 행복을 얻는 것을 복인복과라 하는데 이는 선인선과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복의 결과가 뒤따르는 복인(福因)의 복행사(福行事 / 福業事)를 3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보시(布施: dāna)의 복업사 둘째, 지계(持戒 : sila)의 복업사 셋째, 정진(精進 : bhāvanā)의 복업사 이러한 세 가지 복업사(福業事)는 한역마다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 한역 증일아함의《복업경(福業經)》은 위의 3복업을 달리 옮기면서 그 내용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첫째, 시(施)의 복업 : 마음을 내어 수행자들이나 가난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 오갈 곳 없는 사람에게 밥과 반찬, 의복, 침구, 약품 그리고 주거지나 향, 꽃 등을 아낌없이 주는 것. 둘째, 평등(平等)의 복업 :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항상 반성해 보며, 부드러운 말을 쓰며, 남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며,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지 않고, 항상 진실하여 남을 속이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며, 난잡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또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쁘게 하는 마음 그리고 평등하게 대해 주려는 마음을 이 세상에 두루 채우도록 한량없이 내는 것. 셋째, 사유(思惟)의 복업 :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주의집중[念覺支] 등의 다른 7각지(覺支)를 닦는 것. 이상과 같이 3가지가 복을 뒤따르게 하는 기본적인 행위로서 복 심는 복행이라고 많은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죽고 난 후에 좋은 세계에 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복행 때문으로 설명된다. 다음으로 7가지의 작복이 시설되는데 첫째, 재가자가 절이 없는 곳에 절을 세우는 것, 둘째, 절이나 출가 수행자에게 자리를 보시하는 것, 셋째, 출가 수행자에 밥을 보시하는 것, 넷째, 옷을 보시하는 것, 다섯째, 약을 보시하는 것, 여섯째, 넓은 들판에 좋은 우물을 파는 것, 마지막 일곱 번째 복으로 길 가까이에 집을 지어 나그네가 쉬어가는 것으로 그 복은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네 가지 복의 넘쳐 남'으로 옷, 음식, 거주처 그리고 생필품이나 약을 보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물이 넘쳐나는 것과 같은 복보가 설해지고 있다. 3. 복과(福果) : 복행의 결과 복과는 복인 또는 복행이나 복업의 결과를 말한다. 복업의 3복행 중 보시와 도덕적 생활과 같은 복된 행위는 그 정도에 따라서 3가지 단계의 복과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작은 정도로 적은 복이 있는 세계를 누리는 것, 둘째는 큰 정도로 매우 유복한 상태의 삶을 누리는 것, 셋째는 인간의 범위를 넘은 천상과 같은 즐거운 세계에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복행을 짓는다 하더라도 과연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구체화되어 나타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면 더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작복에 적극적일 수 없다. 따라서 복을 설하는 앞의 여러 경전에서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다름 아닌 ‘복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은 다시 빠알리 《법구경》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된다. 나에게 복에 대한 과보가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단지는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이 떨어져 가득 채우게 되나니, 현명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복을 채우는데 있어 조금씩 쌓는 것으로 이 세상의 큰 복을 채운다. 마치 물 단지에 한 방울 한 방울이 떨어질 때는 언제 물이 채워질까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언젠가는 가득 찬 물을 확인할 수 있듯이 복 또한 작은 선행이 쌓여가면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복 짓기를 두려워하지도 가볍게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초기 경전에서부터 후세의 복덕장(福德藏) 개념까지도 이미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중아함》의 한 경전에서 “복을 지어서 오랫동안 쌓고 또 모아두면 그 복덕은 능히 그 사람을 위해 딴 세상의 즐거움을 마련한다.”는 구절과 상통한다 하겠다. 이렇게 복행과 복과 또는 복보(福報)는 삼세에 걸쳐 나타난다. 그래서 많은 경전에서 현재의 행복함, 유복함, 신체적 건강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는 과거의 복업에 대한 결과로서 이야기된다. 다음은 복과 관련해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위국에 인색하고 탐욕이 많아 모을 줄만 알고 베풀지 못하다가 물려줄 아들도 없이 죽은 장자의 재산이 결국 모두 국고로 환수되고 장자(長者) 또한 체곡(涕哭) 지옥에 떨어졌다는 내용으로 중요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에게 남은 복은) 털끝만큼도 없다. 마치 농부가 다만 거두기만 하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수확할 수 없듯이, (장자 또한 복을 짓지 않고) 곤궁하게 살다가 목숨을 마친 것과 같다. 그것은 다만 수확한 곡식을 먹기만 하고 새롭게 파종하지 않은 것이다. 저 장자도 그와 같이 단지 과거의 복을 받기만 하고 새 복을 짓지 않았기에 오늘 밤에 체곡지옥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복의 문제가 단지 현세의 문제만이 아닌 삼세에 걸친 업보의 문제임이 잘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의 복이 다하고 새 복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결국 복업이 바닥 나 ‘눈물 지옥행’이라는 따끔한 교훈이 실려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의 출현 그리고 예경과 관련한 복 사상을 살펴보자. 여래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있어 요익과 안은과 그리고 자비는 물론 복을 얻게 하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그러한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예배하는 복행의 결과로서 다섯 가지 복(공덕)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 얼굴이 단정하고, 둘째, 음성이 좋으며, 셋째, 재보가 많고, 넷째, 미래에 유복한 장자의 집에 나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난다. 그러한 이유로 첫째의 단정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환희의 마음이 일기 때문으로, 둘째의 좋은 음성은 여래를 보고 귀의하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셋째 많은 재보는 여래를 보고 많은 보시의 이유로, 넷째는 여래를 보고 집착이 쉬어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사후 좋은 세계는 각각 이러한 다섯 인연으로 설명하고 있다. 복행의 복업에 따른 과보는 많은 경전에서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음식 보시의 복과는 강력함을 받고, 의복은 단정한 용모를, 등불은 좋은 눈을, 탈 것은 편안함을, 거처를 제공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받지만 법을 설하는 것은 불사(不死)의 열반을 받는다. 나아가 부처님은 반열반에 임하여 재가자에게 도덕적 생활이라는 복행에 따른 ‘다섯 가지 복과’를 설하는데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큰 부, 둘째, 명성, 셋째, 자신감, 넷째, 편안한 임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후의 좋은 세계가 그것이다. 다음으로 좀 더 세부적인 복과의 설명은 이렇다. 중생으로서 자심을 닦아 심해탈하고, 그 뜻을 널리 펴서 남을 위해 연설하면 반드시 열한가지 복을 얻게 된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자심(慈心) 수행에 따른 심해탈(心解脫)에는 열한가지 복과가 있다. 자심을 키우고 많게 하고, 자심의 바탕과 길에 자심이 확고하고 친숙하게 되어 잘 확립되면 다음과 같은 열한 가지의 복을 기대할 수 있다.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즐겁게 잠자고, 즐겁게 깨어나며, 나쁜 꿈을 꾸지 않으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사람 아닌 존재들의 사랑을 받으며, 천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불이나 독, 칼의 해를 입지 않으며, 마음은 빨리 선정(禪定)에 이를 수 있으며, 안색이 맑고 편하며 죽음에 이르러도 허둥대지 않고 초연하며, 그리고 설령 열반과 같은 높은 경지를 못 얻는다하더라도 범천계에 태어날 수 있다. 4. 복 사상의 평가 누구나 흥하고 성하며 길과 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바램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복은 운이 좋아서라든지 어쩌다 생긴 기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은 외부에 있는 초월자의 주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복이란 외부의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하는 것에 달려있음을 여러 가지로 말씀해주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해서는 늘 스스로 준비해야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임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따라서 항상 복을 짓고 가꾸는 수행의 삶이 바로 불자의 올바른 삶임을 알 수 있다 모셔온글
출처 : 시인의 파라다이스
글쓴이 : 용담 수보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