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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라밀은 목숨바쳐 하는 것, 사무량심과 십바라밀 관계

황령산산지기 2018. 5. 6. 07:25

 

바라밀은 목숨바쳐 하는 것, 사무량심과 십바라밀 관계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나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회원이 됩니다. 회원이 되면 회원으로서 의무가 있습니다. 참여의 의무뿐만 아니라 회비납부의 의무도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보시라고도 하고 나눔, 기부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됩니다.

 

십바라밀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보시를 강조합니다.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 항목에 포함되어 있고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시라는 것이 단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걸까? 놀랍게도 주석서를 보면 보시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테리가타 의석 서문을 보면 6세기 담마빨라는 이와 같이 써 놓았습니다.

 

 

이 세상의 수호자께서는 인간의 존재와 남성적 특징의 성취 등으로 언급한 여덟 가지 고리를 결합시키고 디빵까라 부처님 발아래 위대한 결단을 내려 서른 가지 초월의 길을 채우시고 스물네 명의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아서 차례로 초월의 길을 따라서 친지를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 깨달은 님들을 이롭게 하여 정점에 도달해서, 도솔천궁에 태어나, 거기서 살만큼 살다가 철위산의 만명의 천신들이 그가 부처님이 되도록 인간의 존재로 태어나길 여청하면서 말했다.”(테리가타 의석 서문, 담마빨라)

 

 

여기서 서른 가지 초월의 길(tisapārami)’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자따까(전생담)에서 열 가지 초월의 길 사상에 근거합니다. 초월의 길은 빠라미(pārami)를 번역한 것으로 한문표현은 바라밀(波羅蜜)’입니다. 열 가지 초월의 길은 한역으로 십바라밀이라 합니다. 그런데 서른 가지 길이 있다고 합니다.

 

목숨을 보시하는

 

서른 가지 초월의 길은 한역으로 한다면 삼십바라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삼십바라밀 내용을 보면 불자들이 알고 있는 바라밀개념 보다 훨씬 광대하고 깊고 강력한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와 관련된 바라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바라밀(dāna-pāramī) :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

 

 

보시하는 것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기부하는 것도 아까워서 주저 하는데 과연 처나 자식을 바치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될까? 더구나 목숨까지 보시한다고 합니다. 어디가서 함부로 보시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아승지 십만겁동안

 

우월적 초월의 길의 경우 자신의 손이나 발 등 장기를 보시하는 것입니다. 어느 스님은 부처님에게 손가락을 태우는 단지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체의 일부를 바치는 경우 우월적 초월의 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승의적 초월의 길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자애수행이 있습니다. 자애수행 하는 방법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그 중에 자따까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부처님이 사아승지 십만겁동안 보살로 삶을 살았을 때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희생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생명과도 같은 목숨을 보시 하는 승의적 초월의 길일 것입니다.

 

쑤메다(Sumedha)의 전체투지(全體投地)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 강조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하면 만행이 있습니다. 불교달력을 보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보시, 지계, 인욕,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만행이라 표기 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의 전용용어일까? 초기불교에서도 바라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십바라밀이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십바라밀입니다. 보시, 계행, 출리, 지혜, 정진, 인내, 진실, 결정, 자애, 평정바라밀에다 일반, 우월, 승의 세 종류가 있어서 삽십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목숨걸고 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목숨걸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따까에 묘사된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라밀 공덕을 쌓기 위하여 자신의 한몸 기꺼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투신은 쑤메다이야기에서도 등장합니다.

 

 

싸끼야무니 부처님이 전생에 쑤메다(Sumedha)라고 하는 아마라바띠의 부유한 바라문이었을 때에 출가하여 히말라야에서 대단한 고행자가 되었다. 그가 람마(Ramma)시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디빵까라 여래를 위해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디빵까라 여래는 그 나라 왕의 아들로서 왕의 귀의와 호의를 받으며 두루 가르침을 설하고 계셨다.

 

 

서른두 가지 상호를 갖춘 거룩한 디빵까라 여래를 만난 젊은 바라문 쑤메다는 환희심을 느끼고 미래에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다. 그는 부처님께 바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오백 깔루빠하나라는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바라문 처녀에게 연꽃 다섯 송이를 사게 된다. 그것을 인연으로 쑤메다는 이 처녀와 세세생생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쑤메다는 처녀와 함께 그 꽃송이들을 디빵까라 여래가 지나갈 때 뿌린다. 그런데 그 꽃들은 다른 사람이 뿌린 꽃과는 달리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디빵까라 여래의 신통력에 의해서 그 꽃들은 차양처럼 디빵까라 여래의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본 젊은 바라문은 더욱 환희심을 느끼고 자신의 사슴 가죽옷을 벗어 땅에 깔고는 디빵까라 여래의 발에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디빵까라 여래의 발에 묻은 흙을 닦아 드린다. 디빵까라 여래는 인연이 무르익은 것을 보고 그 젊은 바라문에게 장차 먼 미래에 싸끼야 족의 까삘라국에 태어나 자신과 같은 부처가 되어 싸끼야무니라 불리고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중생을 제도하게 될 것이라고 수기를 준다.”(Buv.207, Mhv.I.5, 테리가타 270)

 

 



부처님의 전생담 쑤메다존자의 이야기를 보면 기존 전승된 이야기와는 약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웅덩이에 몸을 투신하여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발 아래 엎드려 머리카락으로 발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 드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물이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전에 오체투지합니다. 사뿐사뿐 가볍게 합니다. 그러나 티벳불교에서는 온몸을 내던지듯이 합니다. 옷이나 몸을 아끼지 않고 온 몸을 땅바닥에 던지는 것에 대하여 전체투지(全體投地)라 합니다. 전체투지는 쑤메다 존자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디빵까라 부처님 전에 엎드린 것을 시초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세 가지 형태의 십바라밀

 

무엇이든지 목숨을 바쳐 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보살의 삶을 살았을 때 목숨을 던져 바라밀행을 했습니다. 이것이 전승되어온 십바라밀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알고 보면 삼십바라밀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목숨을 던진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을 가장 수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담마빨라가 주석한 세 가지 형태의 십바라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시바라밀(dāna-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

 

(2) 계행바라밀(sīla-pāramī)

예를 들어 남이 소유한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해치지 않는 것은 일반적 계행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해치지 않는 것은 우월한 계행이고,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계행이다.

 

(3) 출리바라밀(nekkhamma-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에 대한 집착을 자르고 출가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출리이다.

 

(4) 지혜바라밀(paññā-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해야 할 일과 유익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지혜이다.

 

(5) 정진바라밀(viriya-pāramī)

모든 일반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고, 모든 우월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고, 모든 승의적 초월의 길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정진이다.

 

(6) 인내바라밀(khanti-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하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하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고,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인내하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인내이다.

 

(7) 진실바라밀(sacca-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의 기관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고, 그들의 생명과 관련하여 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진실이다.

 

(8) 결정바라밀(adhiṭṭhāna-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기관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고, 그들의 생명의 파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결정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결정이다.

 

 

(9) 자애바라밀(mettā-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기관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우월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고, 그들의 생명의 파괴가 도래하더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자애를 떠나지 않는 것이 승의적 초월의 길의 자애이다.

 

(10) 평정바라밀(upekkhā-pāramī)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과 같은 외적인 대상을 돕건 해치건 상관없이 존재와 의지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 평정이고, 그들의 손이나 발 등과 같은 신체기관 돕건 해치건 상관없이 존재와 의지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우월적 평정이고, 그들의 생명을 돕건 해치건 상관없이 존재와 의지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승의적 평정이다. (청정도론 Vism.9.124 각주, 테리가타 의석 서문 17번 각주)

 

 

초기불교에서의 바라밀행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라밀행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목숨바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보살로 삶을 살았을때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목숨바쳐 바라밀행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무량심과 십바라밀과의 관계

 

흔히 말하기를 보살행은 대승불교에서 주로 하고 초기불교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보살행이 미약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이나 논서, 주석서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십바라밀에 세 가지로 설명한 것을 보면 매우 치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십바라밀이 사무량심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자애와 연민 등 사무량심을 설했을 때 강력한 십바라밀행을 염두에 두고 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 제9하느님의 삶(brahmavihāra)’에서 사무량심과 십바라밀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청정을 최상으로 삼는 등의 그것들의 위력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이것들이 모두 보시 등의 일체의 선한 원리들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1) 뭇삶들의 이익을 바라고, 2) 뭇삶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3) 이미 얻은 수승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4) 일체의 뭇삶에 편견이 없고 평등하게 마음을 일으키는 위대한 뭇삶은 이 사람에게는 주어야 하고 저 사람에게는 주지말아야 한다.’라는 구별을 하지 않고 일체의 뭇삶에게 행복의 원인인 (1) 보시를 실천한다.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2) 지계를 실천한다. 지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3)출가를 실천한다. 뭇삶들의 이익과 불익에 미혹하지 않기 위해서 (4) 지혜를 닦는다. 뭇삶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항상 (5)정진에 매진한다. 최상의 정진으로 용맹을 얻었지만, 뭇삶들의 여러 다양한 허물에 대하여 (6)인욕한다. ‘그대들을 위해 이것을 내가 주겠다. 내가 하겠다.’라고 (7)서원을 하면 어기는 일이 없다.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흔들림 없는 (8)결정을 한다. 그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9)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 (10) 평정을 통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초월의 길을 완성하여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여섯 가지 고유한 앎과 열여덟 거지 깨달은 님의 원리로 분류되는 일체의 선한 원리들에 이르기까지 완성시킨다.”(Vism.9.124)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이라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펼치면 십바라밀이 됩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것, 우월적인 것, 승의적인 것 세 가지로 나누면 삼십바라밀이 됩니다.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입니다.

 

뭇삶들(衆生)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공양중에 최상의 공양이 소신공양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수 많은 소신이 있었습니다. 문수스님의 소신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소신은 완성된 자가 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염원으로 가득찬 자가 소신을 하면 일반적은 죽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완성된 자의 소신에는 항상 중생이 있습니다. 이는 청정도론에 따르면 뭇삶들(衆生)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Vism.9.124)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중생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정도의 각오가 되어야 진정한 바라밀, 즉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이 된다고 했습니다.

 

 

2018-05-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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