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네죽음을 기억하라!” 사수념(死隨念) 공덕

황령산산지기 2018. 5. 6. 06:55


네죽음을 기억하라!” 사수념(死隨念) 공덕

 

 

어떻게 최후를 맞이 할 것인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라면 전장터에서 장열하게 전사하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니 죽음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고 생각조차 하기 꺼려합니다.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이며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순간 나의 면전에 서 있을지 모릅니다.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아서

 

아직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장례식장에 가도 죽음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영정사진만 보고 예를 갖출 뿐입니다. 지금 이대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즐기며 살아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안등 (岸藤) 의 비유처럼 썩은 등나무 줄기에 매달려 , ,..”떨어지는 꿀맛에 취한 것처럼 오욕락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죽음은 어둠 저편 보이지 않는 곳에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요즘 백세시대라 합니다. 기대수명이 팔십을 넘어 점차 구십, 백세시대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기대수명일 뿐입니다. 나도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장수하며 자연사하기도 하지만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고사로 죽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 이렇게 죽는구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난기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동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한없이 아래로 떨어질 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립니다. 땅이라면 피할 곳이라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비행기 속에서는 꼼짝할 수 없어서 달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때 , 이렇게 죽는구나!”라며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난기류 지대를 통과하여 비행기가 정상화 되었을 때 그제서야 살았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세월호가 나던 해 시청앞 광장에서는 추모모임이 열렸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다급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처절했습니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자 “아 나, 살고 싶어 ”라며 절규했습니다. 이를 현장에서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나는 꿈이 있는데!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나는!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살고 싶은데!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내가 진짜!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이 썅

진짜 이거 욕도 나오고

나 울거 같은데!

나 진짜 이거 뉴스에 나오면

이 영상 보낼껍니다.

나 진짜 나 웁니다. (울먹임)

 

아 씨 나

개무섭습니다 지금

아 나 지금

이거 입고 있어요 지금

나 무섭다고!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아니 구조대가 오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냐구요

지금 구조대가 와도

300명을 어떻게 구합니까(울먹임)

승객 다 포함해서

1000명 될텐데

 

 

이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아 씨 왓캔아이두

 

헬기가 이걸

어떻게 잡아 줍니까


해경이랑 어선이

오고 있답니다.

 

내가 왜 제주도를

오하마나호를!(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안타서

세월호를 타서

이런 진짜 욕도 나오는데

어른들한테 보여줄거라 욕도 못하고! (분노에 차 버럭 소리침)

 

진짜 무섭고

나는 지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

이거 끈 꽉 묶었습니다 저는

 

나는 살고싶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 나는 진짜 하고싶은게 많은데..(울먹임)

 

아 진짜 나 무서워요 지금

아 진짜 울거 같아요

 

나 어떻해요?(울먹임)

왓캔아이두

 

지금 이렇게 보면

굉장히 편안한 것 같죠?

씨바 니가 와봐요

 

! 진짜 여기까지, 종료 합니다.(체념한듯)

나 살고 싶습니다. , .

하나님 죄송합니다. .”

 

(출처: 세월호 미공개 동영상 ' 꿈이 있는데.. 하필 세월호를 타서' )

 

 

한아이는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정말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살아 나가면 할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 가니 너무 억울하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로는 분노의 목소리를 들으면 죽음이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수명과 질병은 예측할 수 없다

 

생떼 같은 아이들이라 합니다. 자식을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죽음입니다. 피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슬며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 사수념(死隨念)에 이와 같은 죽음의 게송이 있습니다.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의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8.29)

 

 

자신의 수명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만큼 살아야지라며 기대수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태내에서 죽을 수도 있고, 태어나자 마자 죽을 수도 있고, 유년기에, 청소년기에, 청년기에, 장년기에, 노년기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수명뿐만 아니라 질병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이렇게 다섯 가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업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지은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어느 병에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

 

길거리를 지날 때 간판을 의식합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낡은 간판이 떨어져 즉사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는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 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의 명상을 늘 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음의 명상, 사수념(死隨念: maraasati)

 

청정도론에 마흔 가지 사마타명상주제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수념(死隨念: maraasati)입니다. 영어로는 ‘meditation on death’라 하여 죽음의 명상입니다. 수행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기를 원하는 수행자는 홀로 떨어져 명상하면서 죽음은 일어날 것이다. 생명의 능력은 단절될 것이다..’라거나 죽음, 죽음이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Vism.8.4)

 

 

사람들은 살기위해서 삶니다. 죽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수행을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닥치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pahamamaraasatisutta, A6.19)’입니다.

 

청정도론에서도 인용된 경에 따르면 오늘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내가 먹은 음식이 탈이 나거나, 담즙이 나를 격분시키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해야 한다.”(A6.19)라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해도 오늘 밤에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업생(業生)으로 살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한 부처님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Stn.574)라 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알 수 없습니다. 나의 목숨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을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A6.19)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라 하여 한호흡(呼吸)기에도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고요히 죽는 것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고 더 이상 들이 마시지 않으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흡이 정지 되었을 때 생명기능은 끝납니다. 그런데 죽음의 명상 수행을 하면 마지막 호흡을 알아 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큰 경(M62)’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라훌라여, 이렇게 호흡새김을 닦고 이렇게 반복하면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 라훌라여, 이렇게 호흡새김을 닦고 이렇게 반복하면, 심지어 마지막 들숨과 날숨이 사라질 때에도 알아차려지는 것이고 모른 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M62)

 


 


호흡새김을 아나빠나싸띠(ānāpānasati)라 합니다. 사마타 40가지 명상주제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호흡새김을 닦고 익히면 최후의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각주를 보면 수행자가 죽을 때에 새김과 알아차림으로 고요히 죽는 것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고요히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와선(臥禪)이 있습니다. 누워서 하는 수행입니다. 경행이나 좌선과 함께 종종 하기도 합니다.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상당수는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잠을 자기 전에 알아차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의 순간에도 알아 차렸을 때 더 이상 태어남은 없을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적멸(寂滅)입니다.

 

자신의 마지막 호흡을 알아차렸을 때 완전한 열반에 들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날 때 호흡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의 대상이 일어나지 않아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M62)라 했을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해야 할 일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육십이 되서 지난 삶을 되돌아 보니 모조리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인생을 잘못 산 것 입니다. 남들 하는 것처럼 한평생 살았는데 허무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대수명이 갈수록 늘어나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아무 하는 일 없이 숨만 쉬고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의 목숨은 짧다.

저 피안은 도달 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아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오래산다고 하여도

백년이나 그 남짓일 것이다.”S.4.9

 

 

청정도론 죽음의 명상에서도 인용된 게송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그것은 저 피안은 도달 되어야 하고(gamanīyo samparāyo)”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비상해야 하듯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정진하여 저 언덕에 도달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

 

 

게송을 보면 절박합니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경시하지말라가 아닙니다. 이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천년 만년 살것처럼 인생을 오욕락으로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목숨은 없기 때문에 그 목숨을 경시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오늘 밤에 죽을지 모릅니다. 갑자기 죽음에 직면 했을 때 당황해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는 말이 아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죽음을 전혀 대비 하지 않았을 때 공포와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의 명상을 한 자는 정반대의 현상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 사수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지 않은 뭇삶이 갑자기 맹수, 야차, , 도적, 살육자에게 공격당하면, 죽을 때에 두려움, 공포, 혼미에 빠지듯, 이와 같이 빠지지 않고, 두려움 없이 혼미없이 죽는다. 그는 만약 현세에 불사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Vism.8.41)

 

 

어느 순간 죽음에 맞닥뜨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서서히 죽어 갈 때 어떤 자들은 신을 찾으며 울부짖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명상을 늘 한 자는 태연히 죽음을 받아 들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입정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수념 공덕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면 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사수념이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 중의 하나이므로 수승한 뭇삶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닥칠 것이라고 새기면, 근접단계에 이르는 명상주제가 생겨난다.”(Vism.8.24)라고 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면 공덕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공덕이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는 수행승은 항상 방일을 여의고,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을 얻어,

목숨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악을 꾸짖고, 쌓아 모으지 않고,

필수품에 대한 간탐의 티끌을 여의고,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익혀서 그것을 새김으로써

괴로움에 대한 지각과 실체없음에 대한 지각을 일으킨다.”(Vism.8.41)

 

 

항상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살면 정말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조금도 두렵지 않음을 말합니다. 늘 죽을 것을 생각하며 산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일생처럼 살 것입니다. 아니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S4.9)라 했습니다. 한순간도 헛되이 살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깨달았다면 그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혼미없이 죽는다.” (Vism.8.41)라 했습니다.

 

네 죽음을 기억하라!”

 

마라나싸띠(maraasati), 죽음에 대한 새김 또는 사수념 또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할 때는 반드시 나는 죽고야 말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삿된 추구를 버리고 더욱더 외경을 일으켜 집착을 여읜 삶을 산다.”(Vism.3.58)라 했습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둔 삶을 살았을 때 함부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까지만 살아야 합니다. 내일은 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순간을 즐기기만 한다면 죽음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한호흡기간만이라도 가르침을 실천하며 산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수 없이 죽음을 맞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합니다. 간난아기가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여 윤회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죽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다면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막행막식의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라면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늘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한 자에게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Ud.45)라 했습니다.

 

무명으로 덮이고 갈애에 묶인 한량 없는 윤회에서 수없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비참한 죽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은 네 죽음을 기억하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슬기로운 자는

이와 같이 위대한 힘이 있는

죽음에 대한 새김으로 항상

방일하지 않음을 실천해야 하리.”(Vism.8.41)

 

 

 

2018-05-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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