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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본다” 컴컴한 방에 불 켜듯이 한 순간에

황령산산지기 2017. 11. 26. 08:45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본다컴컴한 방에 불 켜듯이 한 순간에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라 했습니다. 먼저 제행무상을 말씀 하시고 불방일정진을 말씀 했습니다. 이를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이곳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었다.”라 번역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Aya tathāgatassa pacchimā vācā.”를 번역한 것입니다. 각묵스님 역시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테라와다 빅쿠는 유훈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비밀리에 남겨 준 가르침이 없음을 말합니다. 유훈과 관련 된 말은 ‘pacchimā vācā입니다. 여기서 pacchimā‘latest; hindmost; lowest’의 뜻으로 한문으로는後的, 最後的의 뜻입니다. 유훈이라 쓸 수도 있지만 최후의 말또는 마지막 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최후로 하신 말씀은 불방일정진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불방일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압빠마다(appamād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빠마다에 부정접두어가 붙은 형태입니다. 빠마다는 ‘negligence; indolence’의 뜻이긴 하지만 어원적으로 ‘mad’라 하여 미치다’ ‘혼미하다의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압빠마다는 ‘carelessness’의 뜻도 있습니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는 일반적으로 부지런 함또는 게으르지 않음의 뜻입니다. 그러나 경에서는 좀 더 폭넓게 쓰여집니다. 그것은 선법과 불선법과 관련 있습니다.

 

선법은 증장시켜야 하고 불선법은 억제 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생겨나도록 하고,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정근입니다. 부처님이 불방일정진에서 정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네 가지 정진에 앞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방일입니다.

 

모든 선법에 우선하는 불방일(appamāda)

 

불방일정진에서 불방일이 앞서 있는 것은 모든 착하고 건전한 법에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새벽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부처님 파세나디왕에게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이익, 양자의 이익이 되는 하나의 원리는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 말하며, “대왕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꼬끼리의 발자국안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는 것도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이익, 양자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S3.17)라 했습니다. 코키리 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섭하듯이, 불방일은 모든 선법에 우선함을 말합니다.

 

불방일은 새벽의 비유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뜨기 전에 전조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S45.54)라 했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먼저 새벽이 오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불방일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최후말씀으로 불방일정진이라 한 것은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불방일정진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특히 불방일은 모든 선법의 원인이 됩니다. 리 발자국 같은 것이고 새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방일하지 말하는 것은 사띠 하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맥락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늘 사띠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팔만사천 법문을 한단어로 요약한다면 사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지막 말씀에서 불방일이라 했습니다. 사띠라 하지 않았지만 주석에서는 사띠로 간주 합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압빠마다란 사띠의 현전을 말한다.(appamāda vuccati sātiya  avippavāso)”(DA.i.104)라 했습니다.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입니다. 부처님이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은 늘 사띠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압빠마다는 얼리버드(Early Bird)’와 같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지저귀는 새와 같습니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는 늦게 지저귀는 새보다 먹이를 발견할 확률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나는 자는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

 

11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수행자는 상인의 어떤 점을 닮아야 하는가?’에 대한 경을 읽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상인의 비유에 대한 경1(A3.19)’입니다. 게으른 상인과 부지런한 상인을 비유로 들어 수행자의 태도를 설명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지런한 상인에 대하여 세상에 상인이 아침에 성실하게 일에 종사고, 대낮에도 성실하게 일에 종사하고, 저녁에도 성실하게 일에 종사한다.” (A3.19)라 했습니다. 이렇게 부지런 한 자는 성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든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밤낮으로 부지런하면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는 게으른 자는 실패 할 수밖에 없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유치원생이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지런한 수행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얻지 못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얻을 수 있고 이미 얻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증대시킬 수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아침에 성실하게 삼매의 인상에 전념하고, 대낮에도 성실하게 삼매의 인상에 전념하고, 저녁에도 성실하게 삼매의 인상에 전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얻지 못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얻을 수 있고 이미 얻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증대시킬 수 있다.”(A3.19)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인 불방일정진과 일치합니다. 밤낮으로 정진해야 함을 말합니다. 특히 삼매를 닦을 것을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전재성님에 따르면 삼매에는 협의의 삼매와 광의의 삼매가 있다고 했습니다.

 

협의의 삼매와 광의의 삼매

 

협의의 삼매는 팔정도에 언급되어 있는 네 가지 선정과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을 말합니다. 대상에 집중하여 사유하고 숙고하여 선정삼매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매입니다. 그런데 광의의 삼매는 찰라 삼매라는 것입니다. 잠깐 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낸다거나 잠시라도 무상을 지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광의의 삼매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에서는 자애와 무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애와 관련하여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 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또 무상과 관련하여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이나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애관 보다 무상관이 더 수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삼매라 하여 반드시 좌선하여 호흡에 집중하는 선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재성님에 따르면 광의의 삼매로서 부정관, 자애관, 무상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불교의 사대명상이라 일컬어지는 호흡관, 부정관, 자애관, 무상관에서 협의의 삼매는 호흡관이라 볼 수 있고 광의의 삼매는 부정관, 자애관, 무상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독송한 두 번째 경은 어떠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이익을 주는 사람의 경(A3.24)’에 대한 것입니다. 경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삼보에 귀의한 자, 사성제를 아는 자, 그리고 번뇌를 부순 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중에 사성제를 아는 사람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사람으로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면, 그러한 사람은 이익을 주는 사람이다.”(A3.24)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시험보는 학생이 시험문제를 풀기 위하여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고성제입니다.

 

부처님은 고성제에 대하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라 했습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럴 때는 초전법륜경(S56.11)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성제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초전법륜경의 고성제를 보면 생노병사 등을 비롯하여 팔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 했습니다. 사실상 괴로움에 대하여 총망라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괴로움에 대하여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괴로움도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성제의 여덟 가지 괴로움에 포섭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설했을 때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에 대하여 알아야 하듯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생, , , ,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 팔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입니다.

 

짧은 행복 긴 고통

 

전재성님은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괴로움에 대하여 무언가 즐길 것이 있을 때 괴로움이 발생된다고 했습니다. 무언가 희망을 가질 때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청년들에게 괴로움이 많은 것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즐기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즐기는 삶은 그때뿐이고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짧은 행복 긴 고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즐겁기도 하지만 아이로 인하여 긴 고통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청년에게청춘을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청년에게 괴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지하철 환승역에서 “젊은이여 후회한다. 지금 즐겨라”라는 캠페인 문구를 보았습니다. 청년에게는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즐기는 삶을 강조한다면 청년들을 결국 고뇌에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님은 즐거운 일이 있다고 생각 하는 순간 괴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체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괴롭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것입니다.

 

일체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고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8)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체 형성된 것이 괴롭다는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존재 등 세 가지 존재(삼유)에서 생겨난 존재의 다발[오온]은 그때 그때 압박에 의해 고통받는데 그것이 괴로움이다.”(DhpA.III.406)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해서, 생겨난 것은 괴멸해야 하는 원리에 의해 고통받는다.” (DhpA.III.406)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체가 괴로운 것이라면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형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1(S35.136)’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괴로움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며 즐길 것을 말합니다. 즐기는 것은 행복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고라 하여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임을 믿는 불자라면 세상에서 말하는 청춘을 즐겨라라든가, “젊은이여 후회한다. 지금 즐겨라”라는 말은 모두 전도된 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즐기는 삶을 살아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체가 괴로운 것임을 알았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본다.”라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끝 부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메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진리의 모음(S56)’에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이 있는 상윳따를 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가밤빠띠의 경(S56.30)’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o bhikkhave, dukkha passati dukkhasamudayampi so passati dukkhanirodhampi passati, dukkhanirodhagāmini paipadampi passati. Yo dukkhasamudaya passati, dukkhampi so passati dukkhanirodhampi passati dukkhanirodhagāminī paipadampi passati. Yo dukkhanirodha passati, dukkhampi so passati dukkhasamudayampi passati dukkhanirodhagāmini paipadampi passati. Yo dukkhanirodhagāmini paipada passati, dukkhampi so passati dukkhasamudayampi passati dukkhanirodhampi passatī

 

벗들이여, 저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벗들이여,

1)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2) 괴로움의 발생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3)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라고 세존께서 직접 듣고 직접 배웠습니다.”(S56.30)

 

 

이 문장은 학술적으로 유명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니까야에서 오로지 이곳에서 볼 수 있을 뿐 다른 니까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청정도론에도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한찰나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의 꿰뚫음을 설명하기 위해이 문장을 인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청정도론에서 관련 문장을 찾아 보았습니다. 청정도론 제22지와 견에 의한 청정을 보면 한 순간에 네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다라는 소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위 게송은] 진리를 관통할 때 이 네 가지 지혜의 각각은 한 순간에 통달지, 버림, 실현, 닦음이 라는 통달지 등의 네 가지 역할을 한다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고유성질에 따라 알아야 한다고 설한 것이다. 옛 스승들이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이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심지를 태우고,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빛을 발하고, 기름을 소모하는 네 가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도의 지혜도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네 가지 진리들을 관통한다. 통달지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관통한다. 버림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관통한다. 닦음을 관통하여 도를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무엇을 말했는가? 소멸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진리들에 이르고, 보고, 통찰한다.”

 

이것도 역시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그러므로 나머지 세 가지 진리들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다시 설하셨다. “도를 갖춘 자의 지혜는 괴로움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이기도 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지혜이기도 하다.”(청정도론, 22 92-93)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성제는 한순간에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아는 순간,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모두 관통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성제에 대하여 통달지, 버림, 실현, 닦음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등불의 비유, 태양의 비유 등을 들었습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아는 순간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한꺼번에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등불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컴컴한 방에 등불을 켜면 일시에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24가지 빳짜야중에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으로 설명합니다. 동시에 구족되는 조건을 말합니다.

 

이 경의 핵심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라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알 수 있고, 괴로움의 소멸도 알 수 있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줄여 말하면 전재성님이 말한대로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본다.”가 됩니다.

 

컴컴한 방에 불을 켜듯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괴로움은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 , , ,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이중에 하나이기 쉽습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알았다면 그 다음 부터는 일사천리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팔고 중에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고 했을 때 이 말을 이해하는 순간 나머지는 모두 풀려 버린다는 말입니다. 오온(五蘊)이 오취온(五取溫)임을 알았을 때 마치 컴컴한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방에 스위치를 올리면 일시에 밝아 집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라 했습니다. 자신이 오온에 집착된 것임을 아는 순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통찰이 일어날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괴로움이 발생될 수밖에 없니다. 이런 앎이 발생 했을 때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한 순간에 네 가지 진리들을 관통한다.”(Vism.22.92)라 한 것입니다.

 

 

2017-11-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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