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퀄스(Equals)와 불교적 세계관
이성(理性)과 감성(感性), 두 개의 말은 서로 대립됩니다. 이성적이냐 감성적이냐에 따라 성향이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이고 감성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감성은 “자극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성적인 것은 사유이고 감성적인 것은 느낌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감성이 메말랐다”라 합니다. 또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공통적으로 ‘느낌(感)’에 대한 것입니다. 이성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거나 부족한 것을 말합니다. 또 이성은 무미건조하고 차갑고 매정한 인상을 줍니다. 대개 이성적인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말로 사용됩니다. 감성은 감정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감정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하여 느끼어 나타나는 심정이나 기분”이라 되어 있습니다. 키워드는 역시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감정이 통제된 SF판타지 로맨스영화 ‘이퀄스(Equals)’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것은 우월한 것이고, 감정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동물적인 감정 보다는 성자와 같은 이성을 가진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날로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인지가 확장 됨에 따라 이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발전할 것입니다. 반면 동물적 본능과도 같은 감정은 갈수록 억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가 있습니다. 최근 케이블채널에서 방영된 ‘이퀄스(Equals, 2015))’ 입니다. 영화의 부제를 보면 “감정이 통제된 SF판타지 로맨스 이퀄스”라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두 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정이 없는 ‘콜렉티브’와 감정이 있는 ‘페닌술라공동체’입니다. 다수의 우월한 콜렉티브 공동체는 그들만의 구역에서 살아가고, 소수의 열등한 페닌술라공동체도 역시 그들만의 구역에서 살아갑니다. 마치 한공간에 문명인과 원시인이 공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콜렉티브공동체에서는 모두 동등합니다. 인간의 감정적 요소를 모두 제거 했기 때문에 지적으로 평준화 되어 있습니다. 이를 영화에서는 ‘이퀄(Equal)’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퀄스 사람들에게도 질병처럼 종종 감정발현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생겨나면 안전부에서는 결함인들을 색출하여 격리시키고 통제합니다. 마치 몹쓸병에 걸린 자들을 격리수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모두 동등한 콜렉티브공동체에서는 유전자 조작등으로 감정이 제거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는 감정이라는 것은 매우 열등한 것이라고 주입교육을 받습니다. 사랑, 증오, 탐욕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가지면 고통이 따를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구가 유지될까요?
감정이 배제된 이퀄스들에게 사랑이나 증오 등의 감정이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남녀의 결합에 따른 출산이 불가능합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성에게는 ‘출산’이라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마치 국민의 사대의무처럼 여성들은 의무적으로 출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의무출산’이라 하는데 남성의 정액을 주입하여 해결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생겨났을 때
감정이 통제된 미래사회에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질병이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이 생겨나면 초조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심하면 우울증으로 발전되고 더 심하면 질병으로 간주되어 격리되어 감정억제 치료제 투여됩니다. 그런데 감정이 생겨남과 동시에 사랑의 감정도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에서는 남녀 두 사람에게 감정이 생겨남에 따라 사랑의 감정이 싹이 틉니다. 마침내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여자는 임신하게 됩니다.
감정이 생겨난 두 사람은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색출하여 격리 수용하여 치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사람은 감정이 있는 페닌술라로 탈출합니다. 소수의 열등한 자들이 사는 세계로 가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질병으로 보고 감정을 죄악으로 보는 세상에서 사랑은 죄가 됩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이 트면 이를 이상징후로 판단하고 격리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성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감정은 열등한 것입니다. 감정이 생겨나면 즐거움도 생겨나겠지만 동시에 괴로움도 발생되기 때문에 삶의 질과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통제된 SF판타지 로맨스영화 이퀄스는 미래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인간에게서 감정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질병처럼 발현 했을 때 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감정은 다름 아닌 욕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입니다. 영화에서 감정이 생겨난 두 남녀가 결국 결합하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영화 이퀄스를 보면서 내내 불교적 세계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와 비욕계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비욕계는 색계와 무색계를 말합니다. 비욕계는 선정삼매를 성취함으로 인하여 그 인연으로 태어나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선정상태에서는 욕망이 억압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등 오장애가 극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욕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애욕, 분노 등의 감정이 없는 세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욕계를 대표하는 색계에서는 성적욕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남녀구분이 없어서 중성의 세계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영화에서 이성이 지배하는 콜렉티브공동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욕계라 합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감성이 있고 감정이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다 보니 탐욕, 분노 등 감정으로 살아갑니다. 감정이 있으면 당연히 욕망도 있게 됩니다. 가장 강렬한 욕망은 남녀의 애욕에 대한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기 때문에 욕계에서는 남녀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감정이 지배하는 금지구역에 사는 소수의 페닌술라공동체가 욕계의 세상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욕계에서는 남녀구분이 있고 색계에서는 남녀구분이 없는 중성의 세계입니다. 기준은 욕망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각적 욕망’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일종의 장애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욕망 (kāmacchanda), 악의(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 회의적 의심(vicikicchā) 에 대하여 마음의 장애로 간주하여 오장애라 합니다. 선정에 들면 오장애는 제거됩니다.
욕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욕망에 길들어져 있습니다. 하루라도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 등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만일 욕망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색계 세상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온갖 감정이 지배하는 욕망의 세계가 훨씬 더 흥미진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똥벌레가 원앙금침을 깔아주어도 기어이 똥구덩이로 향하는 것처럼, 욕망의 맛을 알아 버린 자들은 무료한 색계를 떠나 기어이 욕계의 세상으로 되돌아 가고자 할 것입니다.
수행의 전형적인 20단계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의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욕계의 세상을 떠나 색계와 무색계 세상에 이르고 마침내 삼계를 모두 떠나는 것입니다. 이를 해탈과 열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서는 다음과 같은 20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원담스님의 글에서 옮긴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문과경沙門果經>에 나오는 수행의 전형적인 20단계
1. 여래가 출현하여 완전한 법을 설한 것을 듣고 불법을 믿는다.
2. 법을 듣고 여래에 대해서 믿음을 갖는다. 재가를 버리고 출가하여 범행을 닦는다.
3. 출가하여 세 가지 계를 지닌다.
4. 비구는 감각의 문을 잘 지킨다. 음식의 양을 안다. 잠자지 않고 깨어서 정진한다.
5. 마음지킴正念과 알아차림正知을 잘 갖춘다.
6.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7. 조용한 수행처에 지낸다.
8.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악의가 없는 마음으로...나태와 혼침을 버려...들뜸과 회한을 제거하여...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9.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10. 이선 11. 삼선 12. 사선
13. 지와 견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머문다. nanadassana
14.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manomaya kaya
15. 신통변화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iddhividaya
16. 신성한 귀의 요소 dibba sotadhatu
17.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 cetopariyananna
18.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 pubbenivasanussatina
19.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 cutapapatanana
20.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 asavakhayanana...‘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수행의 20단계를 보면 가장 먼저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하여 가르침을 설합니다. 어느 날 가르침을 들은 자에게서 확신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집에서 사는 것은 번잡하고 티끌로 가득 차 있지만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과 같다.”(D2)라며 출가하게 됩니다.
재가자가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는 이유
출가하면 가르침을 빨리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Sn1.12)’에서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따라 잡을 수도 없습니다. 이를 공작과 백조로 비유했습니다. 화려하기 그지 없는 공작이 희고 고결해 보이는 백조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상에서 공작이 화려 해 보여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창공을 날게 되었을 때 백조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출가해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재가에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빠름을 말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해서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범주를 완성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 착하고 건전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갖추고, 청정한 삶을 추구하고 계행을 구족하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어 만족하게 지냅니다.”(D2)
이것이 출가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지만 더디고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재가자를 공작에 비유하고 출가를 백조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라 한 것입니다.
출가자자는 욕계를 떠난 자입니다. 식욕과 성욕 등 욕계의 기본적인 욕망을 포기한 것은 욕계를 떠나고자 함을 말합니다. 욕계를 떠난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선정 등으로 나타납니다.
출가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마음의 장애와 오염원이 소멸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D2)라고 자신이 스스로 알게 됩니다. 출가의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출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승단에 출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라면 출가자라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라 했습니다.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면 승단으로 출가한자이건 아니건 모두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출가하는 것이 재가의 삶을 살며 실천하는 자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질병같아서
영화 이퀄스를 보면 두 개의 세상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감정이 없는 세상과 감정이 있는 세상입니다. 감정이 없는 세상은 무미건조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과 같습니다. 감정이 없기 때문에 고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지배하는 세상은 즐거움도 있지만 동시에 고통도 있습니다. 남녀가 끌려 감각적 욕망에 따라 사랑을 하지만 동시에 고통도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정이 없는 이성적인 세상에 살 것인가 아니면 고통이 있더라도 감정적인 세상에 살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질과 성향에 따라 달리 대답할 것입니다.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세상이 오로지 기쁨만 있는 천상 보다 더 낫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운 사람들은 천상에서 오로지 기쁨만 먹고 살고자 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만 있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에 따른 즐거움은 반드시 괴로움을 수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쁨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세상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영화에서 감정이 배제된 콜렉티브공동체의 이퀄스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감정은 질병과 같습니다. 감정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오장애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자기에게 이들 다섯 가지의 장애가 아직 버려지지 않았을 때에, 그것들을 빚과 같고, 질병과 같고, 감옥과 같고, 노예와 같고, 사막의 길과 같이 본다.”(M39)라 했습니다. 감정은 한번 한번 생겨나면 소용돌이로 몰아 넣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돌고 돌아 윤회합니다.
이 작은 몸 안에서
영화에서 이퀄스가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감정이 배제된 이성만의 사회가 불교에서 추구하는 세상과 유사한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감각적 욕망 등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한 이퀄스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합니다. 해탈과 열반은 저 멀리 우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몸 안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도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 단신의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
“결코 세계의 끝에
걸어서는 이르지 못하지만
세계의 소멸에 이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남이 있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이는
세계의 끝에 이르고 깨끗한 삶을 성취하며
고요함에 이르러 세계의 끝을 잘 알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s2.26)
2017-10-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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