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삶 뒤에 또 삶(1)

황령산산지기 2017. 10. 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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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것은 크나큰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는 개성적 자아는 영원히 지속한다.

 

당신은 한 송이 꽃보다도 못한가?  꽃의 생명은 무엇인가?  꽃은 꽃봉오리가 따뜻한 햇볕을 받아 활짝 피어난 것이다. 경이로운 꽃향기는 주위에 가득퍼져,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기뻐하게 만든다. 새들은 더욱 높이 하늘을 날고, 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따며, 인간들은 즐겁게 사랑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경이로운 꽃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씨를 맺는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열린다.  아! 이를 '지혜'라고 한다.  이는 삶의 결실이다.  그리고 과실을 수확하며, 가을의 풍취가 만연한 온 땅에서 추수를 한다. 그러고 나면 나무는 그 화창하던 잎을 잃어버리고 북풍에 떨며 앙상한 모습으로 거기게 서 있다. 거대하고 하얀 침묵이 내려오면 나무 가지는 두텁고 눈부신 빛으로 덮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추위에 떠는 황량한 대지가 펼쳐진다.  이제 그 꽃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혜 속에 남아 있다.  지난봄에 자라던 그 모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나오게 된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가고 나면. 봉오리는 다시 나온다. 

보라!  새로운 꽃이 다시 핀다.

 

생명의 지속성을 한 송이 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왜 당신은 자신이 꽃의 생명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신이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과실을 맺고,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고, 그리고 겨울에 죽어버릴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답지 않는가?  당신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  꽃이 봄마다 다시 피는 것처럼, 당신도 생 다음 생 또 다음 생으로 이어져 계속 살 것이다.  당신이 꺾어왔던 그 긴 세월동안 쌓아온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스터 : 내 모친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그녀가 행복한지 알고 싶다.

 

람타 : 죽음을 믿는가? 마스터.

 

마스터 : 때로는 죽음을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계속해서 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아이가 셋이다.  내가 그 애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갓 태어날 때부터 각자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서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양이나 개도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이 한 생에서만 그 성격이 모두 형성된다고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도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람타 : 훌륭한 생각이다.  중요한 진실을 말하겠는데.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기 바란다.  생명에 결코 종말은 없다.  몸을 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목을 따고 내장을 꺼내고 어떤 짓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몸체 안에 있던 개성적 자아는 결코 파멸시킬 수 없다.  어떻게 생각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며, 칼로 베고 멸할 수 있는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라. 그럴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력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각과 감성의 보이지 않는 집합으로서 개성적 자아라고 하면 신체 모습의 내면에 살아있다.  덕성, 활기, 성격을 만드는 것은 생각의 보이지 않는 본질이고, 그것은 에너지이다.  이것이 입을 움직이게 하고 눈을 움직이게 하고 팔다리를 움직이게 한다. 말하자면 이 신기한 에너지가 가느다란 끈을 당겨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아무 것도 에너지를 파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다른 것에게 생명력을 빼앗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커다란 환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직 육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몸 안에 거하면서 육신을 움직이는 그 본성은 다시 돌아오고, 원하면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몸 안에 살아 있는 생명력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해 두라.

 

이제 이 세상을 떠나는 실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겠다. 육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에너지 - 영혼 - 는 그 실체의 영성에 의해 빠져나온다.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 동물들도 영성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와 창조성을 가질 수 없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켜 영혼이 자리하던 공간에게 풀어 주면, 모든 것이 잠잠재지고 평화롭게 된다.  당신의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하느님의 요람에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더 이상 없도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 세상을 떠나면 육신의 본능과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더 이상 두려움, 아픔, 고통, 육신의 배고픔, 걱정을 일으키는 '시간' 이라는 환영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과 관련되었던 모든 것은 더 이상 지니지 않은 채, 유토피아라고 하는 곳에 머물게 된다.  그곳이 '하느님의 요람'인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휴지기에 드는 것과 같다.  영성이 영혼을 불러일으키면, 영혼은 몸 안에 있는 마지막 에너지 센터를 통하여 위로 이동한다.  이 센터를 차크라 또는 막(幕)이라고 한다. 기억의 집합인 영혼은 뇌의 한가운데 있는 뇌하수체라는 마지막 일곱째 막을 통하여 몸의 세포체를 빠져나간다.  이 과정은 종종 바람소리가 들리면서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경험으로 느껴진다. 이 터널을 지나고 나서 보이는 빛이 당신 존재의 빛, 당신 존재의 영성이다.  일단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면, 육신은 죽고, 당신은 다시 자유로운 영혼체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한 순간이고, 고통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은 빛을 내고 눈부시게 밝아진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당신은 단순히 강력한 마음이다.  감성이며, 당신의 몸은 빛의 몸으로서, 빛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에 따라 자신의 전기적 형상을 바꾼다.  그 지점에서부터, 당신은 일곱 세상 중의 하나로 가게 된다.  당신이 어느 세상으로 가는지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감성적으로 표현했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삶이며 그것의 다른 수준들을 말한다.  예수아 벤 조셉은 일곱 하늘나라를 말했다.  사실상 일곱 세상이 있다.  그곳은 실제의 장소이고 실존하는 세상이며, 이 세상은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세상중의 어느 곳에도 인간을 고문하고 벌하는 지옥 같은 곳은 없다.  인간이 그런 짓을 잘하는 것이다.  당신이 육체를 떠나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표현한 의식 이해, 또는 축적된 감성적 태도에 따라, 당신은 항상 그에 걸맞는 세상, 또는 진동 수준으로 가게 된다. 일곱 가지의 깨침, 또는 일곱 단계의 의식, 이해 수준이 있다.  일곱 단계의 이해란 1 번식과 생존, 2 두려움과 고통, 3 힘, 4 느끼는 사랑, 5 드러내는 사랑, 6 모든 생명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7 내가 곧 하느님 이렇게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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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이해를 얻기 위해 당신이 숙고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생각은 그의 고유한 진동률을 가지고, 이것은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통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면, 당신은 고통과 관련된 더 한정된 생각을 숙고하고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고통이라는 감성으로 경험되는 낮은 진동률이 발생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이해하고 또 표현하는 것을 숙고하고 터득하고 있으면, 사랑의 나눔과 표현에 해당되는 더 높은 진동률이 고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의 의식이 초점을 두고 있는 그 이해는 당신이 가게 될 세상이 된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의 영성은 당신을 알맞은 진동률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모친은 이 세상을 떠나, 큰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다.  이는 그녀가 간절히 원했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녀가 얻은 의식 - 이해 정도에 맞는 수준의 세상으로 이끌려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현재 자기에게 맞는 수준의 상태에 있다.  - 당신이 지금 이 상태에 있는 것처럼 그녀가 있는 곳은 네 번째 수준으로서, 느끼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랑의 감성적인 태도에 맞추어져 있다. 당신의 모친은 느낌이 큰 실체이지만, 그러나 종종 그녀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기의 느낌 대부분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과 그녀의 남편은 종종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모친은 고귀한 수준에 있으며, 그녀가 원하는 동안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진보를 생각하게 되면, 그때 빛의 존재로서 생각의 다른 차원으로 확장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또는, 그녀가 선택한다면, 그녀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유전형질을 빌어, 물질의 세상인 이 이승에서 그녀는 일곱 번째 수준의 이해를 향한 진보를 계속할 수 있다. (회전하는 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서 인체의 주요 신경총 근처에 위치한 에너지 저장소다.  회음부, 배꼽, 태양총, 가슴, 후두부, 이마, 정수리의 일곱 차크라가 있으며, 쿤달리니(영적 에너지)가 터질 때 차크라는 생기를 띠고 활성화 된다.  정수리 차크라 (뇌하수체)가 완전히 열리면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한다. 죽음을 경험했다가 다시 살아났던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60% 가량은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30% 가량은 다리를 건너는 느낌을 가졌으며, 나중에 빛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승, 이 현세는 '본보기 세상'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실체는 자신의 창조력을 물질에서 목격할 수 있고, 감성을 어떤 식으로든 실제로 표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곱 중에 어둠이 있는 유일한 곳이자, 빛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유일한 곳이다.  실체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사회의식이라는 프로그래밍을 통하여, 무지로 돌아서 버리는 곳이다. 이러한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진보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이다.

 

당신의 모친이 이곳에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아이외 자식으로 태어나던가, 당신 아이의 자식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녀가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돌아온다면, 당신의 딸이 아이를 가지고자 할 때에 그 딸의 아이로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허용한다면 모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때, 뚜렷한 얼굴과 겉 모습을 초월하는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당신의 느낌으로.

 

이곳을 떠난 당신의 모친도 당신을 알 수 있을까?  아주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하고 있는 모든 수준에 맞추어 자신을 조율할 수 있다.  더 이상 물질 밀도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벼운 밀도, 더 높은 진동 수준에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세상과 나란이 존재하는 사고체나 광체로 나타나는 다른 수준의 진동률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의 모친은 당신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신도 이곳을 떠난 뒤에 원하기만 하면, 여기에 있는 이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친은 행복한가?  당신이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 불행은 당신이 이곳을 떠났을 때 증폭이 된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면 당신은 순수한 느낌과 감성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신의 감성은 증폭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증폭되는 덕분에 당신이 계속해서 기쁨을 더 잘 이해해 나가는 데 필요한 수준이 어디인지를 빨리 알 수 있게 된다.

 

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해 주겠다.  만약에 당신이 그곳을 보게 된다면 당신의 존재에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곳은 의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수준에서 표현되는 곳으로 많은 실체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평원 같은 곳으로 평평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들의 광채로는 산이나 들, 초원과 꽃, 하늘을 볼 수 없다.  빛의 실체로서 수십억의 실체가 끊임없이 줄을 지어서 누워 있다.  그곳에 누워 자신은 죽어 있다는 환상을 가진 채로 잠을 자고 있다.  생명은 무덤 너머까지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생생하고 관심도 있으며 강박관념에 싸여 있기도 하고 변덕을 부리기도 하나, 그의 에너지 측면에서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 데도 그러하다.  기억하라, 어떤 것이라도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진실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그대로 현실로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창조성과 의지는 강력하다. 그곳에 있는 많은 실체들은 그들이 죽으면 구세주가 그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죽은 채로 있게 된다고 배웠다.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신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듯 한 느낌 때문에 그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여러 실체가 줄에 줄을 맞추어 그들보다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에 의해 부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깨우려고 했으나, 매우 적은 수만이 깨어났다.  그 이전에 그들 대부분은 어떤 악마가 나타나서 그들을 깨우려 할 것이라고 배웠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누가 그들을 깨우려고 시도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치고 그 잠에서 깨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릴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르침이다.

 

지금 이야기한 이곳이 유일하게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와 같은 이해를 절대적인 앎이라고 믿고 있는 실체들이 있는 곳이다. 혹 당신이 가서 본다면 당신의 형제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제외한 모든 세상은 장엄하다.

 

마스터 : 람타, 죽은 이를 만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가능한가?

 

람  타 : 당신의 모친을 보고 싶은가?

 

마스터 : 그렇다. 매우 보고 싶다.

 

람  타 : 그렇게 될지어다.  그러기를 모친이 동의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이 모친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신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모친을 빛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녀가 당신보다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빛은 그녀의 원질이 진동하는 매우 빠른 속도에 의해서 나온다.  그 속도에 의해서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실체의 빛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그녀가 높은 진동률로 낮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세상에 있으면서 여기 이 청중 사이에 모여 있는 이들도 많다.  그들이 사랑하는 실체가 이 청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미하게 빛나는 빛이며 당신이 그들을 보려고 하면 시선의 초점을 벗어난 바깥 부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직접 보려고 하면, 원추 세포로 이루어진 당신들의 눈으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있다.  알겠는가?

 

마스터 : 알았다.  고맙다.

 

람  타 : 좋다.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무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믿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억지로 주입시켜 버리는 일이다.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믿어 버림으로써, 당신의 존재에 진리로 정립되지 않은 것을 좇아 살고, 행동하고, 믿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당신은 매우 연약하게 된다.  이처럼 연약한 상태에서 당신은 조종당하고, 저주받고, 비난을 받으며, 그리고 생명마저도 잃을 수 있다. - 모두 믿음 때문에.

 

무엇이든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을 알라.  그저 이해하기를 원하고 당신 존재 안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귀 기울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의 느낌이 지혜롭다는 것을 항상 신뢰하라.  당신의 느낌을 거스르지말고, 내면에서 좋게 느끼지 않으면 억지로 믿으려 하지 말라.  또 살인자와 살육자를 동정하는 것을 배워라.  그들은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겪어야 할 엄청난 감성적 부담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에 수천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자는 곧바로 육신을 갖게 된다.  살인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마스터 : 이 지상의 삶을 떠나면 자신의 삶을 평가하거나 그 다음 생에서 무엇을 할 것이지 결정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는가?

 

람  타 : 이해의 과정 중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태도에 걸맞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 예를 들자면 당신은 '제한 속의 생존' 단계에서부터 고통의 단계, 힘의 단계, 그리고 말없는 사랑의 단계까지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사랑을 실현하고, 사랑을 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다섯 번째 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생을 지나게 되면 낙원이라고 하는 다섯 번째 세상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당신이 현재 인식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이해 수준이다. 달리 말하면 마스터,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이해하게 된 것들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치와 당신의 소중함, 당신이 터득한 진리의 독자성, 당신의 사고과정이 갖는 힘을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위에 있는 생명 가운데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하였다. 다른 이를 동정하고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모든 진실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하고 깊이 숙고함으로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존재의 이상으로서 또한 자아왕국에 실현될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더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존재의 한없는 상태는 아직 보지도, 경험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 현재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먼저 알고 이해할 때까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거나 이상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지혜가 쌓이고 쌓여야만 더욱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먼저 당신 자신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알고 난 뒤 당신 자신에 대해 사랑과 동정심을 표현해 보지 않고서는, 당신은 모든 생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거나 알 수 없고 또 다른 이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없다.  자아에 대한 사랑이 실제로 이해가 되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 이외의 생명까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의 이해가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당신 밖에 있다고 느껴지는 생명마저도 바로 당신 자신임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알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당신은 당신의 사고방식과 감성을 표현하는 태도에 걸맞는 의식 - 이해의 세상으로 가게 된다.  당신은 더 무한한 이해가 가능한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왜냐면 그것이 아직 당신 자신의 현실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이해의 경지가 실재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스터 : 그러면 이곳을 떠날 때 이 세상으로 돌아오건 다른 세상으로 가건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것이다.

 

람  타 :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것이 당신의 사고방식에서 더 무한해지는 법을 내가 당신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유이다.  당신의 생각이 무한해질수록 당신 삶도 그렇게 된다. -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당신이 이곳, 생각과 감성이라는 당신의 왕국에 창조하는 세계가 더 클수록 이곳을 떠날 때나 당신이 선택하여 다시 돌아왔을 때, 당신은 더 큰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한 비판, 형제에 대한 비꼼과 증오 따위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 경험을 계속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 그러한 것들로 그들 자신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그들이 가야 할 더 바람직한 길이나 경험해야 할 더 큰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깨닫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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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의 대통합으로
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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