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죽음, 사랑, 명상

황령산산지기 2017. 8. 1. 06:53

죽음은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오해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무언가의 끝이기는 하다. 비록 극소수의 사람만 삶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지만,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무지함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의 삶과 마주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음은 이번 삶의 마지막 경험이고, 다음번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경험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 개의 삶 사이에 놓인 문이다. 하나는 뒤에 남겨지고, 다른 하나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관한 한 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두려움은 죽음을 말로 꺼낼 수 없는 추한 단어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다. 죽는 사람은 항상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항상 외부에서 죽음을 바라보지만, 죽음은 가장 내면에 있는 존재의 경험이다. 그것은 마치 외부로부터 사랑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대는 수년 동안 사랑을 바라볼 수 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대는 사랑의 표시들을 알 수는 있지만, 사랑 자체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똑같다. 호흡과 심장박동이 멈추고, 말하고 걸어 다니던 사람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살아있는 육체 대신에 죽어 있는 시신이 거기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외형적인 증상일 뿐이다. 죽음은 영혼이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가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의 육체에서 우주 전체의 육체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여정이지만, 외부의 시각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외부의 시각으로는 오직 표면적인 증상들만 보일 뿐이고, 그런 증상들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다.

깨달음을 통해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버리게 된다. 죽음이 추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고요하며 장엄한 경험들 가운데 하나로 바뀐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감옥인 육체 없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아무런 장애물이나 구속이 없는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경험이다.

이런 죽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알 수 있다. 우선 일반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그러면 그대는 여기 존재하지 않고 이미 죽고 난 다음일 것이다. 그대는 죽음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그대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대가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다.

사랑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완전한 사랑에 들어가서 그대가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을 때, 죽음과 같은 경험이 일어난다. 그대는 더 이상 육체가 아니고, 더 이상 마음도 아니며, 순수한 정신이 된다.

명상에서도 육체가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의식의 절대적인 깨어 있음과 절대적인 살아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연인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가 사랑을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명상가는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명상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랑, 명상, 창조성, 어떤 것을 통해서든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유일한 깊이가 존재한다. 그 깊이는 그대가 더 이상 물리적인 육체나 정신적인 육체가 아니라 순수한 지각, 구름 한 점 없고 끝없는 깨끗한 하늘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은 영광스러운 경험이 된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중에서



출처 : 불교미술이야기
글쓴이 : 델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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