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죽음을 마주 보라.

황령산산지기 2017. 1. 1. 17:59

한국에 사형제도가 있을때 사형수들은 아무리 잘 먹어도 살이 안 찐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게 됨으로써 스트레스를 받고 과도한 열량을 소모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서울 서대문에 형무소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형수들은 의무동 호출이나 면회라는 이름으로 사형장의 부름을 받는다.


사형수감방을 나와서 오른쪽은 면회동이 있는 곳이고, 왼쪽은 사형집행장 쪽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기 직전에 교도관이 양쪽에서 팔짱을 낀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무의식적으로 몸부림을  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형장에 도착하고서 이미 집합한 여러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체념을 한다.


비가 내린 후 한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물웅덩이에 빠질 뻔 하였다.

사형수 왈, "잘못 디뎠으며 큰일 날 뻔 했네." 라고 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애착을 갖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도 그러리라고 여겨진다.


실존철학자 샤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 선다" 라고 갈파했다.

1차, 2차세계대전의 폐허와 참담함 속에서 "삶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말이라고 보여진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폐허에서도 희망은 솟아난다.

사라지는 생명과 죽음의 순간을 인식하지만 외면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태어남과 죽음은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삶의 순간 순간마다 항상 죽을 수가 있다.

어쩌면 삶은 항상 죽음의 동반자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면서 삶과 희망을 추구하며 산다.


"과거가 죽어가며 미래가 태어난다."

치매에 걸려서 사람이 마지막으로 잊는 것은 대부분 자기의 이름이라고 한다.

망각이 심해지면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사랑했던 가족을 못 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내가 누구인가"를 잊어 버린다.


사람이 모든 것을 망각하면 자아가 없어지면서 개별성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보여진다.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잊는다는 것은 섭리이며 축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죽는 것이 사는 길로 보인다.


나의 육신은 죽지만, 내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수, 석가모니등은 예전에 육신을 버렸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살고 있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당분간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살고 있다.

이순신장군은 "死卽生 生卽死"라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속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집중해서 하다보면, 살 길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깨달음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철학이나 종교등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만을 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말할 수 없다고 여겨지며,

죽음을 참오하고서야 진정한 깨달음이 시작된다고 하겠다.


"내가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변화만이 있다."

죽음은 아는 것의 시작이며 아는 것의 완성으로 보여진다.


지금 당신은 죽음을 마주보고 있습니까? 




   


 

 

 

출처 : 그날이 오면.....
글쓴이 : 조만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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