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스크랩] 오래된 무덤

황령산산지기 2016. 11. 20. 09:10

 

 

 

       

 

오래된 무덤

 

                                                                                                                          

 

    

   낯익은 장소에서 길을 잃었다. 눈을 감아도 환히 펼쳐지는 익숙한 길을 벗어나 어느 사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부러진 길을 따라 출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평소에도 자주 찾는 공원묘지에 연휴를 맞아 성묘객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가족묘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정경이다. 친지들은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애호품을 마련하여 이승과 저승의 정을 나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위로하듯 묘지는 싱싱한 꽃들로 꽃동산을 이루고 색색의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새와 나비 온갖 인형들이 놓여 있는 화사한 묘지가 끝이 나고 갑자기 적막한 장소에 다다랐다. 인적 없는 낯선 주위가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 넓은 공원묘지를 빙빙 헤매다가 놀라움과 반가움에 차를 세운다.

 

  나지막한 언덕과 언덕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에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조화를 이룬 공원묘지는 집 근처에 있다. 마이클 잭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유명인사들도 망인이 되어 평등하게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분이 없는 평장의 묘비들이 잔디밭에 질서정연하게 누워있던 이곳에 불쑥 나타난 고색창연한 비석이 서 있는 풍경은 경이로웠다. 이십 수년 세월 수시로 오가던 일상의 신작로를 지나 전혀 알지 못하던 비밀스러운 안식처로 숨어드는 망자의 세계였다. 새 식구에게 안부를 나누듯 묘비에 적힌 글을 읽어본다. 묘석에 적힌 이름과 맨 먼저 눈길이 가는 숫자, 저마다 다른 길고 짧은 생애에 사랑하는 가족의 애틋한 마음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제는 새로운 만남보다 이별을 고하는 일이 많다. 인간은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숙명, 그 죽음의 끝은 어디일까? 육신은 사라진다 해도 넋의 거처는 어느 곳 일지 사후의 세계는 베일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주 접하는 부음에 문득문득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사람아 생각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마에 재를 바르며 죽음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어도 먼저 가신 이들의 무덤가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Hodie Mihi, Cras Tibi)’. 신의 영역인 알 수 없는 그 날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리라.

 

  가는 비를 맞으며 오래된 무덤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대부분 사랑하는 가족의 호칭이 새겨진 비문을 읽으며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가는 인생의 덧없음에 숙연해진다. 사별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던 이들도 저승으로 옮겨 갔을 세월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슬픔도 기억도 애통함도 오래된 무덤 사이에 잠이 들었나 보다. 남의 나라 공원묘지에서 다양한 언어로 새겨진 낯선 묘비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오래된 무덤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평화로운 풍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도는 고요함이 아늑하고 편안하다.

 

  대문을 나서면 손지갑이라도 챙겨야 한다. 예전엔 상관도 없던 휴대전화와 자동차 열쇠까지 잃어버릴까 봐 신경이 쓰인다. 외출하거나 여행 가방을 꾸리게 될 때면 언제쯤이면 빈손으로 훨훨 자유롭게 나들이를 떠날까 나도 모르게 생각이 스친다. 꽃샘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내 여행 가방에는 고운 한복과 검정 원피스 한 벌이 들어있었다. 서울에 도착하여 옷을 꺼내 걸으며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으니 한복은 입겠지만, 이 까만 옷은 입을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람의 일은 정말 모를 일이여 한복 대신 검은 상복을 입는 일이 생겼다. 투병 중이던 큰언니의 장례식과 둘째 언니네 조카의 결혼날짜가 같은 날이 되다니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테헤란로를 달리던 어둑한 새벽을 잊을 수가 없다. 임종한 병원에서 성당의 영안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앰브런스 안에서 주무르던 언니의 맨발은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때부터 맨발은 각별한 의미로 각인되었다.

  

 희미하게 바랜 옛사람의 묘비 앞을 서성이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사진 두 장을 떠올린다. 사진 속 그림에는 원삼 족두리 차림의 새색시가 보료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보료 앞 방바닥에는 꽃신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혼례를 기다리는 새색시의 모습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예복을 떠올린다. 나란히 벗어놓은 꽃신, 홀연히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길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또 다른 사진은 공원묘지다. ‘여기도 참 좋다! 묘비에 적힌 글이다. 여기도 참 좋다니, 별똥별이 영혼 깊은 곳에 떨어지는 감동이었다. 누군지 모를 그분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겠구나 싶었다. 내 사후에 남겨진 말은 무엇일까, 내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여기는 더 좋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바람이다.

 

  죽음이라는 어둠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는 빛의 세계를 두려움 없이 기쁘게 걸어가기를 날마다 맨발로 걷는 연습을 한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는 생명의 나라에 당도하는 그날은 참으로 좋은 잔칫날이면 좋겠다. “여기는 더 좋다!”라는 사연으로 천상의 편지를 띄우려면, 지상에서의 삶이 좋은 날들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란 생각에 주신 날수가 더욱 소중하다.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고 바람이 세차게 지나간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고택에 수문장처럼 낡은 묘비들이 묵묵히 비를 맞고 있다. 작은 경당 처마 밑에 비를 피하며 오래된 무덤 곁에서 돌아가신 영혼을 기억한다. 특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의 귀향을 기원하며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마음을 모은다. 비 그친 언덕에는 쌍무지개가 아련히 피어오르고 대나무 숲에는 시계꽃이 빗방울을 이고 있다.

  

 

 

    

         

           2016년 한국수필 대표선집 / 秘密의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작은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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