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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속하여 두 황제을 섬긴 역사속 女人들

황령산산지기 2016. 6. 28. 14:46

연속하여 두 황제을 섬긴 역사속 女人들


연속하여 두 황제을 섬긴 역사속 女人들

한 여인이 두 임금의 부인이 되어 거듭하여 왕비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는 그런 여인이 세 명 등장하기에 소개한다.

 

 

1. 주몽의 모후 유화()

 

유화는 압록강 신인 하백()의 세 딸(유화, 훤화, 위화) 중 큰 딸이다. 그녀는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와 정을 통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낳았다. 그녀를 북부여의 공식적인 왕비로 인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해모수가 정을 통한 뒤 하백에게 청혼을 했으니 왕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유화는 그 후 해모수가 떠나고, 하백에게 내침을 받은 후 동부여금와왕에게 발견된다. 그녀가 금와왕의 공식적인 왕비였는지 여부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금와왕은 주몽을 아들로 거두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태후(동명왕의 모친)로 예장했다고 하니 왕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고국천왕()과 산상왕(山上王)의 부인 우(于)씨

 

우씨는 제나부() 우소()의 딸로서 고구려 9대왕인 고국천왕의 왕비였다. 정치적인 야심이 컸던 그녀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의 아우인 발기 왕제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발기 왕자가 왕비의 행실을 나무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우씨는 다음 왕제인 연우를 찾아갔고, 연우는 그녀를 받아들여 왕위에 올라 산상왕이 되었다.  우씨는 산상왕의 부인이 됨으로써 형(고국천왕)과 아우(산상왕)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 후 발기는 이 사태에 대해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자결을 한다. 우씨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2대에 걸쳐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생을 두지 못해서 왕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을 때,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다면서 산상왕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대로 시행되었다.

 

 

3. 숙창원비 김씨

 

숙창원비 김씨는 고려 충렬왕 때 위위윤으로 있다가 물러난 김양감의 딸로서 용모가 뛰어났다. 그녀는 진사 최문에게 시집갔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충렬왕은 궁인 무비를 총애하였는데, 이로 인해 장목왕후는 가슴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충렬왕에게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모후인 장목왕후의 한을 풀기 위해 무비와 그 측근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에 대한 위로의 마음으로 충선왕이 부왕(충렬왕)에게 바친 여인이 김씨(숙창원비)였다. 충렬왕은 그녀를 총애했다.

 

다시 정세가 변하여 충선왕이 원으로 압송되었고, 충렬왕은 왕위를 되찾았다. 왕이 된 충렬왕은 김씨를 숙창원비로 봉했고, 사랑을 주었다.

 

충렬왕이 세상을 떠난 뒤, 충선왕은 다시 왕위에 올랐다. 충선왕은 빈전에서 제사를 지내던 숙창원비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뒤 그녀를 숙비에 봉했다. 충선왕은 그녀에게 혹해서 한 때 정사를 폐했고, 그녀와 함께 있는데 방해가 된다면서 팔관회를 정지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부왕의 부인을 취한 충선왕의 행위는 우리 나라 왕실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며, 고려의 풍속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 나라는 원(몽골)에 복속한 뒤 부마국이 된 처지였다. 몽골에서는 부왕이 죽으면 모후를 제외한 다른 후궁들은 아들이 취하는 풍속이 있어서 이 일 역시 용인된 듯하다.

 

숙창원비는 충렬왕과 충선왕 두 왕의 부인이 되었지만 제일 왕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왕비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왕비가 1명뿐이고 다른 부인은 빈, 귀인 등으로 호칭했지만, 고려에서는 여러 명의 부인에게 왕비 칭호를 주었다. 그녀는 비록 제일 왕비는 아니었지만, 두 임금 모두 왕비 칭호를 주었으므로 여기에 덧붙였다.

 

출처: 네이버 오픈백과


출처 : 화 목 한 사람들
글쓴이 : 黃眞伊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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