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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욕망(慾望)이란 무엇일까요?

황령산산지기 2016. 3. 23. 08:27

욕망(慾望)이란 무엇일까요?



욕망(慾望)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욕망보다 무서운 것이 없고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괴롭고 또 무서운 욕망은 아마도 애욕(愛慾)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애욕(愛慾)으로부터 근심이 생기고 근심으로 좇아 무서움이 생기나니

애욕이 없으면 곧 근심이 없고 근심이 없으면 곧 무서움이 없으리라.」

.... 하셨습니다.

 

사랑이던 불륜이던 애정은 괴로운 법입니다.

그 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제 22장부터 부처님께서 재물과 색(色)에 관해 설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재물과 색을 탐하는 사람은 비컨대 어린아이가 칼날에 묻은 꿀을 탐하는 것과 같나니

한 때도 족히 달게 먹을 것은 없고 도리어 혀를 끊을 염려가 있느니라.

 

한 사람이 색욕이 그치지 않음을 걱정하여 칼날로써 그 음(陰)을 끊으려 하거늘,

그 음을 끊음이 그 마음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나니

마음은 곧 운전사라 운전만 그치면 모든 기관이 스스로 다 쉴 것이어

늘 사심(邪心)은 제거하지 아니하고 그 음만 끊을 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단음(斷陰)이 불여단심(不如斷心)이라 하였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지요.

애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

근심과 괴로움 그리고 무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읽은 책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있었습니다.

 1947년 미국의 유명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이며,

1948년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는

1947년 미국의 유명 극작가 테너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이며, 194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첫 연극뉴욕, 브로드웨이에서 1947년 12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공연되었고,

엘리아 카잔 (Elia Kazan)이 연출하였다.)

 

 

 

미국 남부 농장의 지주 -‘블랑슈 뒤부아(Blanche Dubois)’와

   동생‘스텔라 코왈스키(Stella Kowalski)’는

미국 남부의 몰락한 지주의 자매로 언니인 블랑슈는 연애결혼에 실패한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동네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州'뉴올리언스'남편과 살고 있는 동생 집에 찾아옵니다.

블랑슈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와....

 ‘무덤선’으로 갈아탄 후 ‘극락 역’에서 내립니다.

 

한편 동생 스텔라는 ....

난폭한 노동자인 남편 스탠리 코발스키(Stanley Kowalski)'에게....

 혹사당하지만 성생활에 만족해 참아내고 있지요.

그러다가 스탠리가 블랑슈와 진지하게 사귀게 된

그의 친구 미치(Mitch)에게 그녀의 과거와 거짓 증언을 알려주어

최고조'에 다다르고 차츰 신경이 쇠약해져가고 몽상에 젖은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제부 코발스키의 성폭행으로 마침내 미쳐버리고....

최후를 맞이한다는 만내용으로 기억 됩니다.

 

조선 후기의 선비 -

중암(重菴) 강이천(姜彝天 : 1769~1801) 의<세 가지 경계[三警)>라는 책에

「막외어욕(莫畏於慾) 막선어인(莫善於忍)

즉, 욕망보다 무서운 것이 없고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 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 중에「도깨비[魍魎]는

 식성이 두꺼비[蟾蜍]를 엄청 좋아하지만

 두꺼비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

두꺼비를 볼 때마다 울면서 잡아먹고, 먹고 나서 죽는다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크게 웃으면서 생각하기를

‘먹는 것이 좋기로 과연 그 목숨과 바꿀 정도란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강이천은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치하고 전쟁을 일으켜 그 나라를 망하게 하고

술과 여색으로 자기 몸을 망치는 자들이 세상에 즐비한데

이들이 다 도깨비와 같은 부류라는 것입니다.

그 도깨비들에게는 나라가 오래도록 평화롭고 자신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사치하고 싸움 벌이고 주색에 빠지는 일시적인 즐거움만 못한 것인가요?

중암은 “욕망보다 무서운 것이 없고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경고합니다.

 

눈앞의 영화와 쾌락 때문에 나라와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욕망을 참지 못하고 두꺼비를 잡아먹는 도깨비와 다름없습니다.

강이천이 세상에 던진 이 한 마디는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경종을 울리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반야용선(般若龍船)

으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요?

 

불교에서 대승(大乘)'이라는 말은....

 ‘힘께 가자.’ 또는 ‘더불어 잘 살자’라는 뜻입니다.

 ‘대승적’ 이라는 말은 서로 적대시하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호 협조하여 원만하게 일을 해결해 나가자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대승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여 함께 세상을 잘 살아가자는 이론입니다.

소승은 이와 반대로 ‘홀로 간다.’ 또는 ‘혼자 잘 산다’라는 뜻입니다.

 

대승불교는 함께 깨달음으로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수행하고 함께 깨달음을 얻어 함께 부처가 되자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가 최고의 목표이지요.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조를 맞추어야 하므로 혼자 수행하면 안 됩니다.

자신도 공부하고 타인도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이에 반해서 소승불교는 혼자 머리 깎고 출가해서

혼자 수행하여 혼자 깨달음을 얻어 윤회에서 해탈하고자 합니다.

깨달음은 남이 같이 해줄 수 없는 오직 혼자만의 승부라는 얘기이지요.

깨달음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남이 해줄 수 없는 것이지요.

나의 번뇌(煩惱)를 남이 제거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깨달아야만 남을 깨닫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길에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마 욕망을 제거하라고 하면 한 중생도 불교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그대로 두고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론을 성립한 것이 대승의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꼭 머리 깎고 출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함께 세속에 살면서

욕망을 누리면서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욕망을 인정합니다.

 

그것이《화엄경(華嚴經)》에서 주장하는 ‘이사무애(理事无涯)’

진리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

세속에서 온갖 부귀영화와 욕망을 누리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겠는지요?

욕망을 그대로 놔두고 세속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욕망과 깨달음은 정반대의 길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갈수록 욕망이 점점 줄어듭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정도에 따라 욕망의 정도가 강한 것이고,

내가 놓아버리는 정도에 따라 자유의 넓이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계행(戒行)은 소승으로 지키고,

세상의 교화(敎化)는 대승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승과 대승을 병진(竝進)할 때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반야용선’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지요?

 

어쨌든 우리는 대승의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성한 욕망을 점차 줄여가면서도 깨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에 발원(發願)이 없고 도에 이르고자 정진함이 있는 가없는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일도양단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 이렇게 대승적인 수행법으로 욕망을 점차로 여의고

깨달음을 얻어 피안(彼岸)의 세계로 노 저어 가면 어떨 까요!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閔 鍾 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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