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세기. 아직 로마 제국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솔로몬은 강력한 왕이라기 보다는 언덕 국가의 족장에 가까웠다. 그런 시절, 시바 여왕의 왕국은 수도 마리브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여 사막에 물을 공급했으며, 유향과 몰약을 생산했다. 시바의 여왕은 향료 무역으로 부를 걸머쥔 아라비아 최강국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영국의 에드워드 슬로콤브(1850-1915)가 1896년에 수채화로 그린 “시바의 여왕”
시바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과 코란, 그리고 고대 아시리야와 그리스 및 로마 작가들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그리고 이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숱한 화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경쟁적으로 그림을 남겼다. 또한 후대의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은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또는 금광을 찾기 위해 유적지를 탐사하기도 했다.
괴이한 상상력으로 환상적인 장면을 많이 그린 프랑스 판화가, 구스타브 도레(1832-1883)의 작품.
“시바의 여왕을 영접하는 솔로몬 왕”
시바의 여왕은 기원전 10세기경 국제적인 향료무역으로 번성과 부를 누리던 사바(혹은 시바) 왕국의 지도자였으며 아프리카에 있는 악숨 왕국(지금의 에티오피아)을 식민지로 통치하였다. 성경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없이 그냥 시바의 여왕 혹은 남쪽의 여왕으로 묘사되었으나, 코란에서는 빌키스(Bilqis)라 부르며. 또한 로마 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그녀를 니카울레(Nicaule)라고 불렀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녀를 흑인으로 묘사하며 이름을 마케다(Makeda)라 했다.
코란에 언급된 사바 왕국의 여왕, 빌키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부유하고 달콤하며,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왕이었으며 신비스런 명성으로 모든 남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성 지배적인 고대 아랍 세계에서 지도자로 우뚝 선 비범한 여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바의 여왕, 역사가들은 그녀의 이름을 “니카울레”라고 불렀다.
왜 시바의 여왕은 스스로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갔을까?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했을 시점은 기원전 953년경, 솔로몬 신전이 완공되었을 때였다. 시바 왕국의 대상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자재뿐만 아니라 목수와 석공들도 예루살렘에 공급하였기 때문에 시바의 여왕도 익히 솔로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주변국의 군주들이 축하 사절단을 보내 왔다. 당시의 시바 여왕의 왕국은 예루살렘보다 더 강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특사를 보내는 것 보다, 여왕이 친히 방문하여 위대한 신전을 눈으로 직접 보고, 소문으로 널리 알려진 솔로몬 왕의 지혜로움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신전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시바 왕국의 가장 큰 재정 수입원인 유향 교역과 관련된 경제적인 목적이 더 컸다. 그 동안 시바 왕국은 동남아시아에서 향목, 중국에서 비단, 아프리카에서 신비한 새의 날개, 거기에다 남부 아라비아에서 채취된 유황들을 고대 이집트나 예루살렘에 공급하는 유향의 길, 즉 인센스 로드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바 여왕의 임무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 통로를 지배하고 있던 솔로몬 왕과의 외교관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고 주무역로를 확보하여 통상관계를 증진코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솔로몬 역시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홍해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여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시바 왕국이 거대한 부를 축척해왔던 인센스로드를 오가는 대상들
이렇게 어느 왕도 시도할 수 없었던 여왕의 예루살렘 방문은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시바 왕국과 예루사렘 사이에는 사막과 산맥이 놓여 있으며 2,4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수도인 마리브를 출발해 아라비아의 사막을 지나, 홍해의 해안을 따라, 요르단 중앙의 오아시스인 모압(Moab)을 거쳐, 마지막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 예루살렘까지 낙타를 타고 가는 여행은 가는데만 최소 3개월이 걸리는 위험한 일이였다.
시바 여왕의 여행 루트
드디어 여왕은 많은 가신들을 거느리고 금, 보석, 가구, 향료, 몰약 등의 선물을 가득 실은 800마리의 낙타와 함께 예루살렘 여행을 떠났다. 낙타 뒤에는 50마리의 코끼리, 기린, 하마, 4마리의 누미디아지역 사자, 그리고, 수많은 노새들이 중무장한 군인들의 보호아래 대열을 이뤘다. 이 대열은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선두의 낙타가 떠난 후 마지막이 출발하기까지에는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영국화가 존 던컨(1866-1945)이 1923년에 그린 시바 여왕의 행렬.
“코끼리 상아, 원숭이 그리고 공작새”로 더 알려졌다.
여왕은 대규모 행렬을 짜 하인, 시종, 요리사, 낙타 인부들과 같이 움직였으며 상당량의 식수와 음식, 비상약, 옷 등을 싣고 인센스 로드를 따라 사막을 건넜다. 또한, 솔로몬 왕과의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상세한 실행 계획과 함께 선각자, 천문학자, 예언가, 외교관 등이 따랐다.
세기경 아폴로니오 디 지오반니의 그림.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바의 여왕 행렬.
그러나, 어느 학자는 여왕이 황량하고 위험한 사막길을 뚫고 갔다기 보다는 배를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남부 아라비아 상인들은 2-8월까지는 인도와 극동 쪽으로 불고 나머지 기간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부는 몬순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했다. 여왕은 75척의 배를 타고 솔로몬 왕국이 있는 걸프 항구까지 여행하였다.
그리고계절풍의 영향으로 여행기간은 3년이나 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상 무역로를 독점했던 그들은 기원후 1세기 초에 그리스 인들이 무역풍을 알게 되기까지 이 바람의 비밀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의 건축물을 복원하는 그림으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1600-1682)의 이 작품은
시바의 여왕이 항구에서 떠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왕을 만나기 위해 시바의 여왕이 해가 뜨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에
항구에서 출발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오른쪽 건물의 계단에서 핑크 가운과 감청색 망토를 걸치고 금관을 쓴 여왕이
고급 관료들과 함께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1648년작.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만남은 양국간의 수뇌급 회담인 만큼, 당시의 외교상 관례에 따라 선물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왕은 낙타에 싣고 온 금, 핑크빛 진주, 코끼리 상아, 유향, 몰약, 향신료, 각종 진귀한 향료 등의 막대한 선물을 솔로몬에게 선사하였다.
특히 선물 중에는 4.5톤 가량의 금(지금의 가격으로 치면 2.4억 불에 달함)과 이스라엘이 과거에는 본 적이 없다는 막대한 량의 향료가 있었다. 그녀는 외교상의 관례를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의 선물을 전달했다. 최고의 예의를 갖춘 그녀는 정치적 동맹 혹은 무역협정 이상을 원했을 것이다.
영국의 에드워드 존 포인터(1836-1919)가 1890년에 수채화로
아주 상세히 표현한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첫 만남”
여왕의 도착에 맞추어 솔로몬 왕은 최대의 예우를 갖춰 환영하였으며 성대한 파티를 베풀었다. 돈을 아끼지 않고 여왕과 수행원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수행원들이 머물 숙소로 실크, 리넨, 화려한 색실로 짠 직물, 각종 드레스, 이라크산 과일, 몽고산 겨울 참외 등이 보내졌다.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바니 데민(1789-1859)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특히 여왕에게는 궁전 내에 화려한 숙소가 마련되었으며 매일 11가지의 화려하고 우아한 드레스가 보내졌다. 또한 그녀에게 시종 350명이 수발을 들게 하였으며 25명의 가수가 즐거움을 전했다. 그 외 밀가루 45포대, 15마리의 황소, 50마리의 양, 그리고 와인, 꿀, 각종 디저트 등이 제공되었다.
제이콥 드브리스(1527-1604)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예루살렘 궁전에서 솔로몬이 여왕을 극진히 환대하고 있다.
성경에는 솔로몬 왕이 그녀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주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양국간 정치적인 협정이 만족하게 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바의 여왕은 육상 무역이 점차 줄어들고 새로운 해상 무역이 열리는 전환기에 새로운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경제외교를 성공시켰다.
네덜란드의 건축가이며 화가인 살로몬 드 브레이(1597-1664)가 그린 “예루살렘 궁전에서의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궁전 입구에서 붉은 가운의 솔로몬 왕이 푸른 외투를 입은 시바 여왕을 영접하는 장면이다.
솔로몬과 여왕은 계속 만나 회담을 했다. 회담과 만찬을 통한 잦은 대화에서 서로의 지혜에 감탄했고, 결국 여왕은 솔로몬을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사랑하였다라는 뜻이 아닐까? 성경에 의하면 솔로몬은 그녀가 가져온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고 써있다. 이에 대해 에티오피아인과 유대인들 전설에 의하면 둘은 사랑을 했고 여왕은 아이를 가진채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6-1492)의 프레스코화 중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만남”을 확대한 장면.
황금색 가운을 걸친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솔로몬은 기원전 961년에 정적들을 없애고 권력자들과 친구를 맺어 왕좌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을 거대한 무역 왕국으로 만들었다. 솔로몬은 많은 군주들과 무역을 하였으며, 이 군주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무역을 넓혔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700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한다.
독일 화가인 니콜라우수 크누퍼(1603-1655)의 솔로몬 왕 앞의 시바 여왕
성경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해 먼 지역의 왕국에서 온 이름없는 여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 씌어진 지 1,000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여왕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남성 위주의 아랍 세계에서 이교도인 그녀는 매력적이긴 하나, 불가사의하며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렇게 그녀는 그리스도와 이슬람계에서 이교도로 인정받아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프랑스의 플랑르드화가인 에라스무스 켈리누스(1607-1678)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영국 캔터배리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왼쪽에 솔로몬 왕이 앉아 있고, 가운데는 시바의 여왕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문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주도권을 장악한 당당한 모습의 시바의 여왕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묘사된 시바의 여왕은 두려워하지도, 넋을 잃지도 않았다. 솔로몬의 궁전 문으로 거리낌없이 들어온 그녀는 분명히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솔로몬이 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캔터배리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있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1180년경 제작
금과 향료로 가득한 남부 아라비아를 다스리는 시바의 여왕은 권력과 부를 가졌으며 미모와 재치가 뛰어난 특별한 여성이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물론 아프리카와 아랍 전역에 퍼져있는 여왕과 솔로몬 왕이 로맨스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베네치아파에 속한 후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미술가인 틴토레토(1518-1594)의 그림,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종교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성 십자가 이야기”를 연작으로 프레스코로 제작하는데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을 삽입하였다. 벽화의 이야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되는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만든 들보를 밟았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후에 이 나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사용될 것이라는 환영으 보게 된다고 한다. 그녀는 무릎을 끓고 이를 경배한다. 이어지는 화면에는 화려한 솔로몬의 신전을 상징하는 코린트식 기둥과 높은 천장이 있는 홀에서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이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황금색 가운을 걸친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시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6-1492)는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작품에다 응용하였다.
그가 1452년에 그린 그림, “신성한 나무에의 경배와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
그러나, 시바의 여왕은 그리스도가 주류인 중세와 르네상스 사회를 거치면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성경 내에서 유일한 여왕인 그녀는 주도족이고 공격적이기에 신의 섭리까지 위협할 수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역활을 대신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 때의 화가 더크 반 델렌(1605-1671)이 그린 다양한 원근감이 돋보이는 그림으로
예루살렘 궁전에서 솔로몬 왕이 시바 여왕을 맞이하고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이나 목판화에는 시바의 여왕을 하급관리나 상인으로 여긴 솔로몬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플랑르드의 화가 프란츠 프란켄 2세(1581-1642)의
“시바의 여왕을 맞이하는 솔로몬 왕”
독일의 요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티슈바인(1750-1812)가 그린 그림. 솔로몬 왕에게 무릎꿇은 시바 여왕
전투복차림의 솔로몬 왕이 궁전이 아닌 길에서 시바의 여왕을 마치 하인을 대하듯 만나고 있다.
위와는 반대로 이 그림에서는 시바의 여왕이 예루살렘 궁전에 도착하였을 때,
외교관례에 따라 솔로몬 왕의 극진한 접대를 받으며 낙타에서 내리고 있다. (작자미상)
전설에 의하면 시바의 여왕은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인센스 로드를 따라 아라비아 반도의 북쪽으로 올라갔으나, 귀국할 때는 이집트를 경유, 남하하여 식민지였던 에티오피아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이것이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이 아이가 에티오피아를 1974년까지 지배한 하이레 세라시에 황제 집안의 시조 메넬리크 1세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시바의 여왕은 홍해를 건너 왕국으로 돌아갔다.
독일 화가 콘라드 위츠(1400 - 1445)의 목판화. 이 그림에는 필리그리,
즉 누금세공으로 장식된 황금색을 배경으로 수행원들은 보이지 않고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만이 부각되어 있다.
두 인물이 만나는 장소는 단독 수뇌 회담을 하는 비밀 접견실 같기도 하고,
또한 은밀한 침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1435년작.
전설 속의 그녀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에서 유명인사였으며, 여성 파워와 미의 아이콘으로 뚜렷하게 존재했다. 그녀는 에티오피아에서는 에티오피아인이었으며, 아랍 세계에서는 아랍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계에서는 남쪽 지방의 이름없는 여왕으로 존재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드몬드 듈락(1885-1953)의 삽화.
화려하게 치장한 시바의 여왕이 잘 생긴 흰 낙타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위험한 사막길을 뚫고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외교를 펼친 맹렬 여성이었으나, 역사의 주류인 그리스도계와 이슬람계로부터 이교도로 인식되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직도 그녀의 이름은 세계사의 아웃사이더로 전설과 신화 속에 갇혀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