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전생과 윤회의 고찰

황령산산지기 2015. 3. 1. 18:18

전생과 윤회의 고찰 


"아래의 이야기는 몇가지 질문에 답을 한 내용입니다."
팔만 대장경에는 여러 곳에 전생과 윤회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그 원리를 소상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이야기나 윤회이야기는 불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있습니다.
구체적이고 소상하지는 못하지만. 공 사상만 해도 인도의 마하비라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옛 선지식들이 잘 사용하는 무심이니 무상이니 하는 말들도

인도, 특히 중국의 도교에서 근본으로 쓰는 용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불교 가르침의 특색은 무엇일까요?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의를 한다면 중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외도들의 가르침은 윤회가 있다든지 아니면 없다든지,

세상이 공하다느니 또는 무상이라든지, 국집해서 주장을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가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논리여서 언뜻 이해가 잘되지 않는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 있으니 잘 살펴야할 것입니다.

그것은 윤회의 본질이 있다고도 할 수가 없고 없다고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표현을 할 때는 하는수 없이

 “있다.” 하기도 하고 “없다.” 하기도 했든 것입니다.
그러나 있어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없어서 없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자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있다. 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 하면 없는 줄 알고 마는 것입니다.”
표현상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고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선지식이 우주의 실상을 설명 할 때,

앞에 듣고 있는 사람들이 윤회가 있고 인과응보가 있다고 마음으로 고집을 하고 있으면,

없다고 설명을 해서 그 집착을 놓게 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선악도 없고 인과도 없으며 미래도 없다. 모든 것은 공하다.

이렇게 고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칠 때는

 윤회도 있고 인과도 있다고 그 원리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선지식이 정말로 세상이 공한 경계를 보고 “세상은 공하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집착을 일으키고 그렇게 설법을 하고 있다면 공에 떨어진 공견 외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설 중에 창조론과 진화론, 또는 숙명론, 공론, 무상론, 성악설, 성선설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불교는 어디에 속할까요? 결론적으로 불교는 어디에도 속하지를 않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학설들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다 외도들의 불완전한 학설들인 것입니다.

창조론을 간단하게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세상은 꿈과 같아서 한 생각 지으면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들이 모이고 모양을 이루면 하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창조했다.” 하고 이야기를 한다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한 단면이지 결코 바른 학설은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진화론이 있습니다.

다윈이 구체적으로 진화론을 주장을 했습니다만,

하나의 개체가 분열과 합성을 통해서 다른 모습으로 변천해 가고

환경에 따라서 적응을 해 가면서 때로는 진화하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한다는 것이

간단한 진화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화론도 부분의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중중무진 수많은 차원의 세계를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비어서 없다는 공론이나 무상론,

그리고 날 때부터 착한 근본을 타고났다는 성선설,

 날 때부터 근본이 악하다는 성악설 등이 있지만 결코 온전한 학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숙명론이 있습니다.

전생으로부터 정해 진 것은 바꿀 수가 없다든지,

인과응보나 업에 따라서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숙명론이 있습니다.

음양 오행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사주명리학 등도 숙명론의 법주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칫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숙명론을 결부 시켜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불교의 가르침은 숙명론도 아닌 것입니다.

전생을 이야기하고 결정된 과보를 이야기 하니까,

비슷한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결코 숙명론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공덕을 짓고 노력을 해도 부자가 될 수가 없을 것이고

 돌이나 바위는 영원히 돌이나 바위여야 할 것입니다.

또 악인은 아무리 참회를 하고 선행을 닦아도 악인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열심히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나, 수행정진을 해도 아무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 하늘에 있어서 마음 데로 정해 놓았다면

 이미 숙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애를 쓰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고

죄를 짓든 공덕을 짓든 그 책임은 하늘에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전생의 생각과 익힌 습기가 금생에 까지 와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전생이라는 것도 생각 속의 일이고 자기가 스스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 생각하고 행하기에 따라서 다시 미래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도 필요하고 마음을 닦는 것도 필요 한 것입니다.
전생이나 윤회를 잘못 알고 있으면 무기력 해 질 수도 있고 자기의 행위를 합리와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자신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지 가르침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앞서 언급한 모든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뜻의 낙처가 어딘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배울 때, 몇 년 전문으로 배우면 나름대로 견해가 생기고

아름아리가 생겨서 아는 척하는 아만심이 생깁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법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10년이 지나면 안다는 것이 그럭저럭 사라지고

 더 더욱 알 수가 없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 그 때 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말을 아끼면서 법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만, 수십만 권에 이르는 불경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책, 한두 권 보거나 교과서에 언뜻 나오는 내용을 보고

어느 한 구절을 가지고 자기의 짧은 견해를 덧 부쳐서 불교가 어떻고 어디가 잘못이다. 하고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양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모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어디가 잘못 된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다행히 선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지고 배우려고 할 것이지만

선근이 없는 사람은 악담을 하고 비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법을 비방하는 대 악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은 까마득히 모르고 잘하고 있는 줄로만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몸에 징조가 있으니 위장병이나 다른 병들이 생기고 집안에 화합이 깨지며

이웃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징조가 있지만 본인은 모르고 ?아 다닙니다.

요즘 최면술이나 초 심리학의 연구가 활발해서 전생이야기가 시중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문제도 있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면으로 전생을 본다 하는 것은 거의가 엉터리라고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최면에 걸린 사람이 어떤 상념이 떠오르는 것은

시술자의 생각이 전달이 되거나 본인이 평소에 생각했든 숨어 있는 생각이 떠오르거나

주고받는 말속에 암시에 따라서 영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흐린 것입니다. 맑고 맑은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숙달이 되어서 좀 맑아졌다. 하더라도 잘못된 사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들이기 때문에

전생을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엉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당신은 진시황제의 후신입니다. 양귀비의 후신입니다. 하고

마구 잡이로 이야기하는 엉터리 영매도 많이 있습니다.

 다 망상 속에 꿈을 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빙의란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초자연적인 힘에 접신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접신도 알고 보면 다 자기 잠재의식의 발로인 것입니다.

때로는 특수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근본 실상의 위치에서 보면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전생회귀라는 것도 때로는 인정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둑을 잘 두는 프로가 있다면 그분은 자나깨나 바둑만 생각을 하고 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계기로 전생회귀를 하면 오래된 대국도 기억을 하고 복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알 수 없고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래 전문으로 익힌 기술을 한 십 년이나 그 이상을 사용하지 않아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 생에서도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전생으로부터 익히고 쌓인 습은 이몸의 세포가 DNA의 지도에 따라서 복제를 하듯이

자기의 숙장에 기억이 되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발동을 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적응해 가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했다 하지만 아무나 최면 등으로 전생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생이라도 알고 보면 생각과 기억 속의 일이요 꿈속의 일이기 때문에

기억을 못할 것은 아니지만 최면 따위로 쉽게 모든 기억을 되살려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근간의 일은 그런 대로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되살렸다 하더라도 일반 범부의 기억이 다 정확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제 일도 잘못 기억하는 일이 있는데

 평범한 범부의 기억이 정확 할 수 없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원리는 같습니다.
이런 행위를 몇 년이고 시행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신경계의 변화를 가져 올 수가 있습니다.

이 몸과 정신계의 구조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시험하고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사람 몸받기가 실로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 경전에 수없이 등장을 합니다.

인간계에 속한다고 정의 할 수가 있는 이 우주는 끝이 없고 끝인가 하면

그것이 또 새로운 시작이며, 물질이 곧 정신으로 정신의 세계란 무한한 것입니다.

꿈속에서 끝을 찾듯이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백 천의 무수한 차원의 이야기야 한량이 없는 것이며

그 속의 온갖 생명체의 움직임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의 세포 속에 또 우주가 있고 그 하나의 우주 속에 또 우주가 전개 되듯이 중생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천상으로부터 지옥까지 그러한 세계가 한 무리를 이루고 그 한 무리가 헤아릴 수 없이 거듭 중첩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보이고 들리는 일체의 모습들을 다 중생들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 굳이 나누어서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은 유정이라 하고

움직임이 나무나 목석과 같이 약한 것은 무정이라고 할 뿐입니다.

깨닫지 못한 것은 다 중생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으로부터 지옥 중생들까지 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히 중생의 경계는 한량이 없는 것입니다.
간혹 참으로 불교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사람들이

유치원과 같은 수준의 사고로 사람들이 "현재 70억으로 불어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하고

그것만 보아도 윤회는 없는 것이다." 하고 단정을 짖기도 합니다.
의문을 가지는 것 까지는 좋지만

자기 수준을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단정을 하는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부처님은 힌두교의 제자로 힌두교의 윤회설을 빌려왔다." 하고

제법 아는 듯이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윤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간혹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듯 한데,

윤회설이라도 힌두교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근본으로 다른 것입니다.

 힌두교의 윤회설은 숙명적이면서도 창조론 적인 것입니다.

범천이 인간을 차등을 두어서 창조했다,

또는 어느 종파는 자재천이 인간을 창조했다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곧 창조설과 숙명론의 합작인 것입니다.

결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과는 처음부터 틀린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역대 고승들은 힌두교의 교의와 윤회설의 허구를 철저히 파악하고 논파 했든 것입니다.

따라서 카스트 제도의 잘못을 지적했든 것입니다.

힌두교의 윤회설은 행위와 원리에 의해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범천이 정해준 대로 태어나고 윤회를 하는 숙명적인 성질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근본실상과 모든 세계의 구성 원리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전생 이야기도 하고 윤회 이야기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의 바위산이 가루가 되어서 흙이 되려면 수천, 수 만년의 세월이 걸리듯이

하나의 박테리아가 수많은 분열과 합성을 거처서

다른 생물로 탈바꿈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리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특별한 인연으로 인간 몸을 잠시 버리고 축생의 몸을 받는다 하면,

그 인연이 끝났을때 다시 인간 몸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만약 점점 복이 다하고 습관이 달라져서 인간 몸을 거듭받을 때마다 모습이 흉해지고

복이나 정신이 인간의 몸을 받을 수가 없는 단계가 되면

결국 인간의 몸을 잃고 다른 몸을 받을 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생각 자체가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다시 돌이켜서 인간의 몸을 회복한다는 것이 너무어렵고,

인간의 세월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백천 만겁에 만나기 어렵다고 했든 것입니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는 미생물 뿐만 아니라 냉혈 동물 들의 구조까지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 몸에 천상과 지옥이 공존하고 생각과 습관속에 천상과 지옥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다만 금생에 인연 따라서 어떤 성품과 모양이 밖으로 들어나서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성스러운 모습이 되기도 하고 천박한 모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처음 태에 들어서 모습이 생길 때는 동물이나 사람이나 고기나 비슷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동물대로 행위에 의한 습관이 있고 익히고 쌓은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몸을 받은 후에는 그 속에 갇혀 한 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운명이 끝나면 또 다른 생각이 하나의 몸을 만들고 그 생각과 몸으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시하고 시키는 사람도 없지만 스스로 생각과 익힌 습관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술꾼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삼년 정도 술을 함부로 마시고 취하여, 세상을 잊어버리려고 하면 알코올에 중독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신경계는 변해서 밥을 먹지 않고 술만 먹어도 살수 있는 이상한 몸으로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른 몸의 변화와 그 나름대로 인생과 주변환경의 변화가 자연히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알기 쉬운 운명이고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인과응보란 자연발생으로 순리적으로 오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간과 순서는 일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장 다가오기도 하고 금생이 아닌 내생에 다가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같이 겪기도 하고 주변의 가까운 인연들과 같이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과 둘이 아니며 주변과도 생각과 행위가 교감을 같이 해온 날이 많아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인과가 발동할 때는 움직일 인연을 만나야 발동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의 씨앗이 가만히 있다가 습기를 접하면 싹이 트듯이 때가 되면 다가오는 것입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똑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금생에 발동을 하더라도 그 원인과 결과를 잘 모르고

인과가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정한 원리가 있습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악한 행위를 하면 벌이 내리고 선한 행위를 하면 복이 생기는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때로는 간단히 정리를 해서 그렇게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인과응보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응당 다가오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까지 연속이 되면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정신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느낌상 간발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몸과 정신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강제적으로 보내는 것도 아닌데 지옥에 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운전하는 사람 중에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잠깐 졸음이 온다든지 전날의 과음으로 피곤했든지

다른 원인으로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불안하다면 사고가 날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상대가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지난 묘한 인연으로 얽혀서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사고는 막을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원리가 능엄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만,

 온갖 미움과 증오로 한평생 남을 해치기만 한 사람이라면

 조금의 따뜻한 기운도 남아 있지를 않을 것입니다
비록 힘이 없어서 직접 해치지를 못했다 하더라도 생각으로나마 평생을 증오심으로 보냈다면

그 사람은 지옥 업이 생기는 것입니다. 100% 극을 이룬다면 그렇습니다.
미물을 아무 생각없이 살생을 좀 한다고 지옥 업이 형성된다든지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지옥이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본질은 허망한 것이지만

당사자의 눈앞에는 아까 어느 술꾼이 술 중독이 되어서 딴 세상을 살 듯이

그 증오심은 불로 현실화되어서 불타는 지옥이 온전히 나타나고 그 속에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업의 눈에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정신이고 그 정신은 곧 감각이고 안이비설신의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지옥이 존재하지 않지만 없는 세상을 꿈속에서 만들어 가지고 느끼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듯이

고통을 크고 길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온전히 그런 모습을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 앞에는 다른 세계는 보이지도 나타나지도 않고 오로지 지옥의 고통만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정된 것은 없기 때문에 만약 깊고 큰 변화가 마음속에 일어난다면

 그 순간 눈앞의 불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살림살이 가운대도 어떤 사람은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옛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주 근본 실상은 정해진 모양도 없고 늘고 줄지도 않으며

나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본래 그 대로라고.”
그토록 시간도 공간도 없지만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 있는 듯 한 몸을 느끼게 되고,,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이지만 그 속에 돌고 돌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묘하다." 하고 탄식을 하는 것이며, '없다.'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몸도 정신도 사상도 천상도 지옥도 윤회도 다 허망하고 근본 성품은 예로부터 변함이 없지만

무명으로 인해서 행 불행이 반복되고 끝없이 주고받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므로

부처님은 본래성품을 깨달아서 해탈하도록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천상에 나는 것도 아니고 결코 하늘을 섬기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부처님을 섬기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법이 진리다. 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근본실상을 깨달아서 담박에 윤회를 끊어 버리고 해탈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람쥐가 돌고 도는 채바퀴를 아주 벗어나듯이.
그러나 세간을 떠나고 산속에 들어가 생각을 목석과 같이 하는 것이 도를 닦는 근본 모습도 아니며,

세간과 더불어 다같이 성불하는 것이 불교의 참뜻인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의 교설에 의지해서 풀어서 설명을 했지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을 한다 해도 결국 본인 스스로 감각으로 알아져야 할 것입니다.

생각으로 이리저리 맞추어 안다 해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비밀을 알고 전생을 안다 해도 그것은 생각 속의 꿈이고

인생이나 정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정진을 바로 해서 모두 근본성품을 보아 의문을 해결하고

 할 일을 마치는 것이 더 중요 할 것입니다.

 

 

 

 

-벽공 스님-

출처 :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
글쓴이 : 태일(太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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