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윤회의 비참함

황령산산지기 2015. 3. 1. 18:00

윤회의 비참함

1) 여섯 세계

뭇 생명이 다시 태어날 세계는 카르마에 의해서 결정된다.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뭇생명을 세 가지 악한 세계(지옥, 굶주린 귀신 세계, 동물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반면,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는 세 가지 복된 세계(인간 세계, 아수라의 세계, 하늘 세계)로 인도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 가운데 동물의 세계는 매우 명백하다.

동물들은 인간과 밀접한 카르마적 관계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옥과 굶주린 귀신의 세계는 직접 지각이 불가능하다.

직접적인 지각(知覺)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세계를 부정할 충분한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지각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실제로 갖가지 카르마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은 어마어마한 제한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붓다의 지혜가 큰 바다라면, 우리의 지혜는 고작 풀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물에 색깔이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배냇봉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여섯 세계의 특성을 하나하나 살펴서 카르마외 그 결과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시키도록 하자.

* 지옥(地獄)

빙한(氷寒)지옥과 화염(火炎)지옥이 있다.

도둑질하고, 다르마를 비방하며, 다른 사람들을 추위에 떨게한 죄과로 빙한지옥에 떨어진다.

많은 원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나 남의 삶을 파괴한 죄과는 화염지옥에 걸맞다.

사람이 임종(臨終)할 때, 자신의 카르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지옥에 태어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은 굉장히 추위를 느끼면서 따뜻함을 구걸할 것이다.

바로 이 따뜻함에 대한 갈망이 그를 화염지옥으로 안내한다.

독사의 맹독이 차차 온 몸에 펴져서 생명을 앗아 가듯이.

일찍이 뿌려 놓은 카르마의 씨앗이 무르익어 죽을 무렵에 완전히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잘 깨우치면, 지옥세계의 존재를 믿기가 수월하다.

화염지옥은 화산에 비유될 수 있다.

그의 의식은 용암(熔岩), 곧 녹은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불 속에 던져진 조개탄처럼 불꽃과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빙한지옥의 좋은 예를 제공하는 것은 극(極)지역이다.

얼음덩이를 몸삼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지옥은 악한 카르마와 악한 카르마를 해결할 장소와 고통을 받을 자,

이 세 가지 요건이 결합하여 창조된 세계이다.

보리행경에서 산티데바(Santideva)보살은 묻는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마루를 누가 만들었는고?

 타오르는 자신의 몸을 뒹굴며 울부짖는 저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셨네. 이 모두 악한 마음의 열매라고."
비록 지옥이 마음의 영상(映像)이고 실재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그 고통은 인간 세계처럼 리얼(real)하다. 곧 꿈 속처럼 환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지옥의 일생은 몹시 길며, 카르마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지극히 무거운 카르마 탓에 지옥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지옥에서 일생을 마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우주에는 수 없는 세계가 있지만, 아직 악한 카르마가 덜 소멸된 생명들이 다시 태어날 곳은

역시 지옥보다 그리낫지 않은 세계이다.

 형기(刑期)를 다 마치지 못한 죄수가 남은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다른 형무소로 옮겨가는 경우처럼.

지옥에 대한 명상을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할 수 있다.

첫째, 어느 특정한 지옥을 택하여 그곳의 고통과 그 곳에 떨어지는 원인을 명상하고,

그 원인이 현재 자신 가운데서 자라고 있지 않는지를 검사해 보는 일이다.

둘째는 자신의 덧없는 삶과 죽음, 그리고 지옥에 태어나는 모습 등에 대한 명상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을 지옥 사람으로 가정할 수 없거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지옥에 떨어질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고 여겨지면,

자신이 지난 세상에 지은 카르마 때문에 지옥에 태어날 수도 있다고 상정(想定)해야 한다.

또한, 죽음은 필경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과 살아있음은

"아직 죽지 않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마음의 작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 이유는 죽음에 의하여 그의 생(生)이 바뀔 때,

 하나의 원인이 지난 세상의 카르마 등에 영향을 받아 복합적인 형태의 결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또 그는 이미 과거 생(生)의 기억을 잊어 버리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지난 세상에 그러한 행위에 익숙해진 습관을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세상에 익힌 행복을 주는 카르마 역시

훌륭한 필적처럼 남아서 그를 수행의 길로 이끌어 준다.

세심히 살핀다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살펴 지난 세상의 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직 "윤회의 법칙" 을 믿을 때 여섯 세계에 대한 명상이 가능하다.

스스로가 현상 세계의 법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르마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설명을 아무리 전개해 봐야 결과는 언제나 미흡할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라. 마치 금을 감정하듯이,

 무게를 달아보고 잘게 부수어 녹여 본 다음 그것의 가치를 확신하라.

단지 나를 신뢰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옳지 않다."

* 굶주린 귀신의 세계(餓鬼界)

정신적인 성취가 없는 사람은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탐욕과 재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탐욕과 재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원인이다.

지난 세상에 어떤 것을 지나치게 욕심낸 댓가로 그들은 항상 그것은 굶주린다.

산같은 음식물과 바다만큼의 물이 눈 앞에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볼 수조차 없다.

수천년 동안 그런 처지로 지내기 마련이다.

야윌대로 야윈 몸체, 툭 튀어나온 배, 그리고 쇠약한 건강이 그들의 특징이다.

여름철의 서늘한 달빛과 겨울철의 따뜻한 햇볕도 그들에게는 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여는 사람들의 경우, 사흘만 굶어도 몸이 극도로 약해지며

게다가 더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워 진다.

그러나 굶주린 귀신에게는 고통을 그치게 할 죽음의 혜택도 없다.

카르마가 다할 때까지 그런 삶은 끝없이 이어진다.

굶주린 귀신들의 삶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이와는 약간 다른 고통을 받는 귀신들도 있다.

가령 음식이나 물을 볼 수 있는 귀신이 있다.

우연히 음식물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들라치면 당장 방해물이 나타나 그를 좌절시킨다.

또 그가 물을 보고 마시려 하면 물은 금새 피고름이나 독수(毒水)로 변하여 구역질을 자아낸다.

굶주린 귀신 가운데에는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무리도 있고 해를 끼치는 무리도 있다.

어떤 귀신들은, 비교적 작지만 즐거움과 소유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항상 아무것도 갖지 않은 체 한다.

그런 귀신들은 언제나 남을 해롭히려는 생각들로 꽉 차있다.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부푼 악한 카르마는 마침내

그를 더 열악(劣惡)한 세계로 내던질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굶주린 귀신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언제나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단지 지난 세상에 저지른 자신들의 악행 때문에 귀신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과 행위가 그 세계에 태어날 조건에 합당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장차 귀신의 몸을 받기 마련이다.

카르마와 그 과보의 법칙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 동물의 세계

동물들의 괴로움은 쉽게 이해된다.

동물들은 힘없고 약하며 작은 과오로도 손쉽게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인간은 커다란 고통을 덧붙여 준다. 사정없이 때리고 잡아 먹기를 예사로 한다.

동물들은 모든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배고픔을 몸 하나로 견뎌야 한다.

이와같은 동물들의 괴로움은 거의 어리석음, 곧 지혜의 결핍에서 온다.

바람직 하지 못한 행위의 습관 때문에 한번 이 세계에 태어나면, 다시 인간의 몸 받기가 매우 어렵다.

동물들의 삶에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물자(物資)와 자유가 거의 결여되어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성행위(性行爲)가 동물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원인이다.

첫째, 대상 : 부모나 스승, 혹은 남의 배우자와 관계함은 삿되다.

둘째, 시간 : 그믐날,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날,

또 여인네가 생리 중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젖먹이를 기르고 있을 때,

이와 같은 경우에 성행위를 함은 그릇되다.

셋째, 장소 : 절. 성지(聖地), 성직자가 거처하는 곳에서는 성행위를 피한다.

네째, 방법 : 변태적인 성행위는 금지된다.
" ** 같은 놈"이라는 식으로 동물을 빗대어 남에게 욕설을 퍼 붓거나

, 다르마의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도 동물 세계로 내던져지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같은 일을 한 기억이 있는 사람은

참된 마음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의 고통을 면하고자 붓다와 법과 스승들께 나아갑니다.

원컨대,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선을 성취할 때까지 이 마음 한결같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 인간 세계

인간에겐 크게 생. 노. 병. 사 등 네 줄기의 괴로움이 있다.

a. 태어남
태아(胎兒)는 어머님의 자궁 안에서부터 심한 고통을 받는다.

주머니같이 생긴 애기집이 늘 단단히 죄고 있는 데에다,

어머니가 움직이거나 먹고 마시며 추위와 더위를 느낄 때마다

아기는 절벽에서 뚝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이윽고 열 달이 차면 공기의 카르마(air of Karma)가 아기의 몸을 자궁 밖으로 밀어내는데,

이때 아기는 거대한 두 개의 산 사이에 꽉 끼이는 것 같은 압박감을 경험한다.

비록 어머니가 조심스런 손길로 아기를 안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주지만,

차라리 그것은 모래종이에 몸을 비벼대는 기분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는 이유는 세상과의 첫 접촉이 그토록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무지(無知)하고 어리석은 특성

-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한 특성은 어느 정도 남는다. -

은 바로 그가 자궁에서 보낸 열 달의 영향이다.

b. 늙음
어느 누구도 늙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 갈수록 몸과 마음의 기능이 쇠약해져 가기 마련이다.

젊은 날에는 칼끝처럼 예리하던 지력(智力)도 녹이 슬거나 아예 무뎌지고 만다.

공원 주변을 할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노인들에게도 한 때의 젊은 시절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사뭇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결과적으로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하게 되면 그 번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기력하고 병약한 세월에 치여서 오직 죽는 날만 순꼽아 기다리는 노인들도 허다하다.

다르마의 수행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도 늙음처럼 맞부딪치는 장애는 없다.

c. 죽음
내일 신변에 무슨 사고가 생길지, 세상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죽음이 언제 자신을 택할지 알 도리가 없다.

언제 어떻게 죽게 되리라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 친구 및 친척들과 영원한 이별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사람과도 그때에는 결별해야 한다.

지옥의 울부짖음을 듣고서도, 그것이 직접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외마디 절규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 아수라(Asuras)의 세계

시기, 질투가 많으면 이 세계에 태어난다.

아수라들은 욕망의 하늘나라 신들과 앙숙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 없다.

승패가 뻔한 싸움일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 하늘 나라

일생 동안 열 가지 악행을 짓지 않으면 하늘 나라의 신(神)으로 태어날 수 있다.

수명은 엄청나게 길고 즐거움이 끝도 없지만,

지나치게 안락(安樂)한 환경에 탐닉하느라 대부분의 신들은 다르마에 대한 생각을 않고 지낸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수명이 너무 짧다고 여긴다.

마침내 복된 카르마가 고갈되며, 죽음을 맞이하기 칠일(하늘 세계의 시간으로) 전에

하늘 신은 자신의 죽음과 자신이 재생할 곳을 본다.

 번민 때문에 마지막 칠일은 그가 살아온 모든 세월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훌륭하던 몸은 빛을 잃고 불결해지며 악취까지 풍긴다.

그의 몸을 장식한 하늘 꽃도 시들어 가고 앉은자리도 불편하기만 하다.

친구들마저 그를 외면한다. 대부분의 하늘 신들은 죽은 뒤에 보다 못한 세계로 떨어진다.

행복을 초래하는 카르마가 거의 다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늘 세계에 태어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2) 세 가지 괴로움(三苦)

* 감각적인 괴로움

사람이면 의례 겪는 괴로움이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이 괴로움을 알 수 있다.

세속적인 뭇생명이 감수해야 하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고뇌, 고통, 갈등이다.

* 변화의 괴로움

다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무지한 데에서 변화의 괴로움이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괴로움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가령 그늘에 쉬고 있다가 몸이 으스스 추워 온다고 느낀 사람은

곧 햇빛이 쬐는 따뜻한 장소로 옮겨갈 것이다.

러나 한참 지나면 태양빛도 너무 따갑다. 그래서 이제는 도리어 서늘한 그늘로 다시 들어 선다.

이처럼 자주 바뀌는, 규정할 수 없는 만족의 기준이 "변화의 괴로움"을 드러낸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압제자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국민이 있다면

처음 해방을 맞았을 때 그들은 무조건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얼마 못 가서 이번에는 자국(自國)내에서

내부적인 압박 요인이 우후죽순처럼 치솟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애쓴 끝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성취의 댓가는 행복만이 아니다. 그 지위에 따르는 책임을 짊어지고,

뒤쫓아오는 경쟁자들에 맞서느라고 그에게는 문제와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행복은 새로 얻어진 이질(異質)의 상황이 아니라,

전에 겪던 상황의 형식적 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껍데기만 갈아 씌운

그 괴로움덩이에 가치를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운다.

그런데 그것이 왜 행복처럼 느껴질까?

앞서 얘기한 "감각적인 괴로움"보다 이해하거나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은 한번 성취되면, 갈수록 시들해져서 마침내 괴로움으로 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점점 행복감이 견실해져야 마땅하다.

결국 다르마의 눈(法眼)을 통하여 볼라치면

그런 건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의 이명(異名)일 따름이다.

 진정한 행복의 씨앗은 언제나 다르마의 수행에 있다.

* 삶 자체가 괴로움

윤회하는 삶 바로 그 자체가 괴로움이다.

삶 자체는, 앞의 두가지 괴로움의 근거가 되며, 번뇌를 초래하는 행위를 만드는 도구 노릇을 한다.

다음 생(生)은 그 행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손

등이 벗겨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은 첫번째의 "감각적 괴로움"이다.

누구나 그 고통을 안다. 둘째의 "변화의 괴로움"은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깊은 사람이 이해한다.

그러나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이치는 오직 성자(聖者)만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다.

손바닥 안에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비벼보라. 쉽게 감촉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삶 자체가 괴로움"임을 눈속에 들어간 머리카락처럼 아프게 느낀다.

"감각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의 바램이다.

욕망과 형체 없는 하늘 세계(無色界)의 신들은

 "변화의 괴로움인 삶 자체"로 부터 자유롭기를 갈구한다.

윤회하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이 세 가지 괴로움이 불가피하다.
첫째, 생존(生存)이 항상하다는 믿음.
둘째, 생존이 행복이라는 견해.
세째, 사실상 더러움의 덩어리인 몸과, 마음의 네 가지 요소(감각작용, 표상, 의지작용, 식별작용)가

깨끗한 것이라는 신념.
네째, 모든 현상. 생명에 독특한 본질이 있다는 독단(獨斷).

이와 같은 신념들이 그릇된 견해임을 인식하여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데 실패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괴로움을 피할 길은 없다.

다르마 수행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의 명상(meditation)이 소개된다.

통찰(contemplation, 觀)과 집중(concentration)이다.

통찰을 실천하면 현상의 덧없음. 카르마와 결과의 법칙.절제. 온전한 몸 받음.

만물의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생기(生起). 자비심. 보리심(Bodhicitta).

수냐타(Sunyata, 空)의 의미 등에 관한 직관이 생긴다.

집중을 실천하면 마음을 순수한 하나의 점(點)으로 모을 수가 있다.

통찰을 끝낼 무렵에는 언제나 그 직관된 바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통찰을 제쳐두고 집중만 해서는 명상의 성과가 없다.

다르마를 수행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배운 것을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받아들일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하고, 그릇된 견해를 부수는 방법을 바로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수행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있고, 부적당한 시간이 있다.

또 다양한 방법을 동시에 써서 수행할 수 없으므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한 가지를 택하여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그 방법으로써 수행에 몰두해 본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 잠시동안 통찰을 실천하면

침체한 기분을 돌이키고 집중을 위한 더 강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다.

나무꾼이 거목(巨木)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도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통찰),

정확한 지점을 힘껏 내리찍어야(집중)하는 법이다.

더욱이 미혹(迷惑)의 뿌리는 너무 깊어서 당장 뽑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쉬지않고 파들어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괴로움을 끝내고 싶으면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시바삐 올바른 방법을 찾아내어 익히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불교의 수행에는 지혜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계시(啓示)되는 법은 없다.

오직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아서 - 지혜롭게 만드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뭇생명은 자신의 스승인 동시에 적(敵)이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출처 :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
글쓴이 : 태일(太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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