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의 거석
1722년 3월 어느날. 네덜란드 해군의 야코브 로헤벤 제독이 남태평양을 항해하다가 지도에 없는 외딴섬을 발견했다. 섬에 다가간 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망망대해 속의 작은 섬에 엄청난 거인 석상(石像)이 수도 없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5m도 넘는 귀가 큰 석상들이 섬을 빙 둘러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섬에 도착한 날이 마침 부활주일(Easter Day)이었으므로 우리는 그섬을 ‘이스터’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헤벤이 떠난 뒤 50년쯤 지나 제임스 쿡 선장이 이곳에 왔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이 이스터섬을 찾았는데,한결같이 놀랍고 신기해했다. 1914년에 이곳을 방문한 영국의 여성 탐험가 라토리지는 이런 글을 남겼다.
‘왜 석상을 만들었을까. 이 초인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주인공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스터섬에 서 있노라면 한없이 무서워진다. 20m나 되는 거대한 얼굴들은 죽음의 시를 읊고 있는 듯하다…?
이스터섬은 지구상에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고립되어 있는 절해 고도이다. 제일 가까운 남아메리카 칠레에서조차 3,600㎞쯤 떨어져 있다. 이 세모꼴 화산섬의 길이는 동서 15㎞,남북 10㎞이고 넓이는118㎢이다. 바람과 파도가 거칠지만 기후는 서늘하고,풀밭에 양떼와 야생마가 돌아다닌다.
로헤벤이 처음 발견했을 때 토박이 말로 라파누이라고 불리던 이 섬에는 5,000여명이 살고 있었다. 그뒤 140년 만에 라파누이는 사라졌다. 1862년 페루 노예 상인들이 1,000여명을 붙잡아 가면서 천연두와 결핵을 퍼뜨려 토박이가 111명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1864년부터 백인이 하나둘 건너와 살게 되자 이스터섬은 1888년 칠레의 땅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섬의 인구는 약 2,000명. 그중 토박이 약 600명이 서해안 보호구역 20㎢에서 살고 있다.
모아이
‘모아이’라고 불리는 석상들은 산허리와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다. 높이 3∼12m에 무게가 20t이나 되는 이 석상의 수는 약 1,000개. 하나같이 다리가 없고 얼굴과 몸통만 있다. 바닷가에 세워진 석상은 ‘아후’라고 불리는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받침대는 조상의 영혼을 모신 곳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섬을 빙 둘러 바다가 보이는 곳에 260군데나 있다. 아후 하나의 크기는 대개 길이 45m,높이 2.4m,너비 2.7m이다.
석상들은 본디 받침대 위에 세워졌으리라 짐작되지만,지금은 거의 흙 속에 묻혀 있다. 또 처음에는 모자같이 생긴 붉은 돌을 머리에 얹었는데 오늘날에는 몇개 남아 있지 않다.
석상들은 휴화산인 라노 라라쿠의 분화구 안에서 나온 화산암으로 만들어졌다. 분화구 안에는 지금껏 돌을 떠내다 만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미처 못 만든 석상이 300여개나 널려 있다. 그 중에는 길이 20m에 무게가 50t이나 되는 것도 있다. 분화구 바깥에도 꽤 많은 석상이 비탈 아래로 옮겨져 있다.
석상 중에는 분화구에서 16㎞나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있다. 어떻게 옮겼으며,어떤 방법으로 받침대 위에 올려 놓았을까. 이스터섬에는 큰 나무가 자라지 않기 때문에 통나무 위에 놓고 굴렸을 리는 없다. 도대체 누가,왜 이것들을 만들어 어떻게 옮겨 세웠을까. 그들은 언제,어디로 사라졌을까.
1947년에 뗏목 콘티키호를 타고 남태평양 8,000㎞를 가로지른 20세기 최고의 탐험가 토르 헤이에르달은 1957년에 이스터섬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가 본 것 가운데 제일 놀라운 것은 얼굴 석상들이 쓰고 있는 붉은빛 돌모자였다. 어떤 것은 코끼리의 두배쯤 되리만치 컸다.
“외딴섬에 기중기도 없이 어떻게 돌모자를 저 꼭대기에 얹었을까?”
헤이에르달은 이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은 이 섬의 전설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설을 깊이 연구했다.
이스터섬의 전설
옛날 이 섬에는 두 종족이 살고 있었다. 한 종족은 귓불에 구멍을 뚫고 줄을 꿰어 무거운 추를 달고 지냈기 때문에 귀가 길었다. 또 한 종족은 귀에 추를 매달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귀가 짧아보였다.
귀가 긴 장이족(長耳族)은 귀가 짧은 단이족(短耳族)보다 머리가 좋고 힘도 세서 차츰 섬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때 두 종족이 싸워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그밖에 10여개의 씨족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려 싸웠다는 전설도 있다. 이들의 싸움은 몇 차례나 대량 학살과 식인(食人) 축제로 이어졌는데,결국 한쪽 진영이 큰 싸움에 져서 멸망했다는 내용이다.)
헤이에르달은 이 전설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추리해냈다. 섬 안에 서있는 석상이 하나같이 긴 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장이족이 단이족을 노예처럼 부려서 석상을 만들었음을 뜻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만들다가 만 석상이 수백개나 있다는 점이다(산기슭에 묻힌 석상들은 임시로 판 구덩이에 안치되어 있었는데,나중에 완성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한 상황을 말해주듯 밑바닥이 평평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느 날 석상 만드는 일이 갑자기 중단될 만큼 큰 사건이 터졌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헤이에르달은 그같은 추리를 뒷받침할 증거로 ‘이코’ 도랑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코 도랑에서 끝없이 불길이 타올랐고,거기에서 한 종족이 전멸했다고 한다. 그는 산꼭대기 근처를 발굴했다. 도랑이란 아마도 오늘날의 참호였을 터이고,어느 한쪽인가가 유리한 곳을 골라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싸웠을 것이 틀림없다. 추리는 틀림없었다. 그는 겨우 나흘 만에 도랑의 자취를 찾았다. 깊이 파들어가니 도랑이 깊이 4m,너비 12m나 되었다. 지층 단면(斷面)에는 검붉은 재가 남아 있었다. 불에 탄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도랑 밑바닥에 무수히 널려있는 둥근 돌멩이는 산으로 올라오는 적에게 던지려고 쌓아둔 것이 뻔했다.
헤이에르달은 이스터 섬의 지배자가 장이족이었다는 가설을 세우고,다음과 같이 석상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갔다.
장이족은 그들의 권세를 나타내려고 단이족을 시켜 석상을 만들게 하였다. 석상 하나를 만들어 세우는 데는 어림잡아 1,000명이 필요했을 터이니,단이족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노동에 시달렸으리라.
어느 날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장이족은 산꼭대기에 도랑을 파고 거기에서 밑으로 돌을 던졌다. 단이족이 돌세례를 뚫고 다가오자 도랑에 불을 질렀다. 단이족은 이것마저 뛰어넘어 마침내 장이족을 불타는 도랑 속으로 밀어넣었다. 생존자는 2∼3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석상 만드는 일이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몸뚱어리가 거의 다 되어 가던 석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얼굴만 남았다.
석상에 얽힌 수수께끼는 이 정도 풀이로는 얼른 받아들일 수 없는 의문이 많다. 그토록 큰 돌을 옮겨 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단이족이 왜 쉽사리 장이족의 노예가 되었을까. 그들을 다스릴 만큼 뛰어난 장이족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멸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조그만 섬에 어떤 까닭으로 전혀 다른 두 종족이 살게 되었을까.
헤이에르달은 이같은 물음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발굴에서 보듯이 전설이란 맹랑한 듯하면서도 사실일 경우가 뜻밖에 많다. 자질구레한 일들은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지만,전체의 큰 흐름과 줄기는 대개 들어맞는다.
전설에는 이 섬에 두 종족이 함께 살았다고 되어 있다. 전체 줄거리로 보았을 때는 맞는 말이지만 더 파고들어 가면 틀린 말이기도 하다. 내 추측으로는 본디 단이족만 살고 있었는데 장이족이 쳐들어와 단이족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장이족은 어디서 왔는가?
헤이에르달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400년 전 남아메리카의 페루에서 건너온 잉카족이다. 스페인군에게 쫓겨 바다로 달아난 잉카인들은 이 섬으로 건너와 폴리네시아 계통의 토박이인 단이족을 지배했던 것이다. 잉카인들은 뛰어난 솜씨로 페루 땅에 이룩했던 그들의 거석문화 솜씨를 망명지인 이곳에 되살리고자 했다. 붉은 돌모자를 얹은 기술이야말로 잉카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같은 헤이에르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뛰어나지 않다는 점과 이스터 섬의 문화·언어가 남아메리카보다 폴리네시아와 비슷하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또 아후를 만든 솜씨가 잉카처럼 뛰어나지만 잉카 문명이 탄생하기 훨씬 전에 만들어졌다는 점도 지적했다.
결국 학자들은 서기 400년께 동남아시아에서 폴리네시아를 거쳐 온 이스터섬의 토박이는 잉카 문화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잉카 문화의 선구자였다고 본다.
석상의 건설 이유
석상은 왜 세웠을까? 학자들은 신상(神像)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추장이나 성직자의 모습을 조각했다고 본다. 이스터섬의 주민들은 죽은 이의 혼백을 부르면 혼백이 얼마 동안 석상에 들어가 살면서 부족이나 후손을 축복한다고 믿었다.
석상을 만드는 데 사람이 얼마나 동원되었을까? 학자들은 석상 하나를 완성하는 데 1년에 50∼300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이 숙련공이라고 전제하고 추정한 것이다. 만들어진 석상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산비탈에 세워진 석상은 화산 위에서 밧줄로 묶어 끌어내린 후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똑바로 집어넣었을 것이다. 멀리 운반할 석상은 아마도 통나무 썰매를 이용했을 것이다. Y자형 썰매를 석상의 배에 붙들어매고,A자형 틀을 이용해 끌었는데,물에 적신 골풀을 땅바닥에 깔아 썰매와 지면 사이의 마찰을 줄였을 것이다. 곳곳에 깨어진 채 버려진 석상들이 이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 준다.
석상은 어떻게 세웠을까? 헤이에르달은 섬 주민 10여명을 시켜 25톤짜리 석상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게 했다. 그들은 석상의 배 밑에 돌을 1개씩 쌓고,5m 길이의 통나무 2개를 지렛대로 사용해서 18일 만에 해냈다. 그들의 선조는 흙으로 둑을 쌓고 둑의 비탈로 석상을 끌어올린 다음 밑으로 내려뜨려 세운 뒤 둑을 없애는 방법도 썼을 것이다.
문명을 이룬 주인공은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자취만이 향수에 젖은 듯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석상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그들에 얽힌 신비는 영원히 풀 길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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