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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휘법

황령산산지기 2008. 1. 15. 12:22
◆ 피휘법 ◆

이름을 아끼고 소중히 했던 전통

현대에는 서양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게 흔해졌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름이 많이 불리어 지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꺼렸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부모님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함부로 불리거나 하면 싸움이 날 정도로 우리의 전통에서는 자신의 이름이든 남의 이름이든 이름 자체를 매우 아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낀다는 것은 단순히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만 아니라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숭고한 도덕적 정신이 깔려 있다. 이는 이름에 걸맞는 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를 사용하였는데 성인식 때 정해지는 자(字)는 주로 이름과 같은 의미를 지닌 글자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는 자를 불러도 되었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반드시 호를 불러야 했다.

옛 선인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관습은 피휘법(避諱法)과 관련된다. 피휘법이란 용어는 현대인들에게 생소한 용어일 것이다. 글자를 풀이해보면, ''''피''''는 피한다는 뜻이고 ''''휘''''는 역시 피한다는 뜻도 있으나 ''''어른의 이름'''', ''''제왕·성인·상급자 및 존경받는 사람의 이름''''을 뜻한다. 그러므로 피휘법은 ''''제왕, 성인, 존경받는 사람, 부모, 윗사람 등의 이름을 부르거나 이름자를 함부로 쓰지 않는 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피휘법이 쓰이게 된 것은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부터였다. 중국문화 수용 이전에는 이름을 즐겨 불렀던 것이 우리 나라의 원래 관습이었다. 왕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교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개인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리는 경향이 생기면서 이름과 같은 뜻이나 연관된 전고에서 자(字)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당에 유학하였던 김인문은 이름 이외에 ''''인수(仁壽)''''라는 字를 가졌고 이후 문인들이 字를 가지게 되면서 피휘의 관행이 생겼다.

피휘법이 보다 엄격하게 적용된 대상은 역시 왕이었는데 왕의 이름자를 당시 또는 그 왕조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왕의 이름자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한 조처를 국휘(國諱)라고도 칭하며 왕조가 바뀌면 전왕조의 왕의 이름자는 피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피휘법의 사용은 신라 말기부터 밝혀져 있다.

중국에서 피휘법이 가장 성하였던 때는 당, 송나라 시대였다. 당 문화를 수용한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 하대에는 피휘법이 운용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건국된 고려는 신라문화를 곧바로 계승한 것이 아니므로 초기에는 피휘법이 곧바로 적용되지 않다가 중국문화의 수용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종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피휘령이 실시되지 않다가 중기 이후 송 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피휘법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

중국에서 피휘법을 쓰게된 때는 선진시대부터이다. 이때부터 군주의 이름을 뜻은 같되 음이 다른 글자로 바꾸어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를 ''''피휘대자법(避諱代字法)''''이라고 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의 유교사상에서는 이름을 중히 여겨 이런 조처가 생겼지만 국휘를 하게 된 것은 전제 군주권의 확립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군주의 권위는 절대불가침이라는 사상이 피휘법에 강하게 배어들었던 것이다.

이름을 아예 쓰지 않고 모(某)로 기록하거나 비워두는 방식인 ''''피휘공자법(避諱空字法)''''도 기록에 보이는데, 이 경우에는 주를 붙여 글자를 쓰지 않은 이유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가하면 피휘할 글자를 쓰되 읽는 사람이 읽지 말라는 표식으로 글자의 획 중 한 획을 긋지 않는데, 이는 ''''피휘결필법(避諱缺筆法)'''' 또는 결획법(缺劃法)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문자 생활에 대단한 번거로움을 주었기 때문에 왕명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글자로 쓰는 관례가 나타났다.

고려 역대 왕들의 이름에서 피휘가 고려되어 이름을 지은 경우는 5대 경종과 15대 숙종의 개명, 16대 예종, 18대 의종으로부터 23대 고종까지, 그리고 25대 충렬왕 이후 충숙왕을 제외한 왕들을 들 수 있다.

피휘법이 제정된 시기는 유교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전제황권을 수립하려 한 광종 15-16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태조 이름 ''''建''''자와 혜종 이름 ''''武''''자와 정종 이름 ''''堯''''자를 각각 ''''立'''', ''''虎'''', ''''高''''자로 사용하였다. 국가에 의한 피휘령이 내려지기 이전에도 유교적 지식이 많았던 문인들은 글을 지을 때에는 가능한 한 왕의 이름자를 쓰지 않으려 하였다.

선종 즉위년(1083) 11월에는 피휘법에 대한 공식적인 법령이 발표되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처에 의하여 개인의 이름이나 사원, 주, 부, 군현의 이름, 기타 공사건물의 명칭에 왕의 이름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의 어휘(御諱)는 당대 임금만이 아니라 선왕들의 어휘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름의 글자만이 아니라 음이 같은 글자도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군주의 이름뿐만 아니라 같은 시호를 받은 경우도 고쳤고, 중국 황제 이름과 같은 고려 국왕의 이름도 고쳤다. 이처럼 국휘의 범위가 넓어지자 국왕만이 아니라 태자의 이름도 피휘하여 신료들 중에는 이름을 고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고려조의 안유는 조선 세조의 이름과 같은 음이기 때문에 안향으로 조선조에 바뀌어 칭하여졌고, 성종의 이름인 ''''治''''자를 ''''理''''로 바꾸어 써서 ''''光明治世''''가 ''''光明理世''''로 된 것이 그 예이다.

고려의 피휘법은 이후 조선조에도 계승되었는데 조선 국왕의 이름이 옥편에 없는 글자로 지어진 것은 이런 결과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엄격히 지켜졌던 피휘법, 그 중에서도 국휘법은 ''''민주사회''''인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불합리한 일로 여겨진다. 왕의 이름자, 심지어 음이 같은 글자도 쓰지 못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대역죄, 불경죄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함은 물론이고 때로 목숨까지 왔다갔다하는 상황은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와 같은 피휘법, 국휘법을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과거의 피휘법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조상, 부모님, 윗사람, 더 나아가 다른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이름까지도 함부로 쓰지 않고 소중히 여겼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함부로 회자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항상 몸가짐, 마음가짐을 정결히 하고자 했던 그 정신은 현대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참고문헌>

정구복, 고려조의 피휘법,《한국중세사학사(I)》, 집문당, 1999.

출처 : 나의 八高祖
글쓴이 : ryury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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