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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황령산산지기 2006. 12. 17. 17:59

中宗 15년(1520년)에 제주로 유배되어 온 김정(金淨, 1486~1521)은 제주풍토록에 곶자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삼읍이 모두 한라산의 산발이라, 산길이 험악하고 자갈이 많아서 평토가 절반도 되지 않아 밭가는 자는 어복(魚腹)을 도려냄과 같고, 땅이 평탄하고 넓은 것 같으나 멀리 바라보기 어려우니 오목하고 높은 곳이 있는 까닭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곶자왈이 울퉁불퉁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고 토양의 발달이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요철지형을 이루고 있어 농사짓기에 알맞지 않은 척박한 땅을 보면서 제주인의 억척스런 삶의 표현 방식을 이야기한 것일 것이다.


 또한, 곶자왈 숲에 들어선 수목의 기이한 형상을 바라보며 “나무 높이는 열자 남짓하나 큰 것은 혹은 기둥과 같고, 떨기를 좋아하며 줄기와 가지가 또한 크고 많아서 수십가지가 서로 얽혀 용(龍)이 서로 얽힌 것 같고, 돌무더기를 널리 덮어 괴상하고 늙어서 껍질은 굳어지어 오랜 것은 누르고 자주빛이고 이끼와 같은 얽은 무늬가 있고, 새것은 푸르고 얼룩지어 귀여우며, 그 잎은 사시사철 푸르니, 이 땅에 볼만한 것이 없되 오직 이 수림(樹林)만은 참으로 기이한 경승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곶자왈에 자라는 생명체들의 삶의 방식을 보고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을 곶자왈을 이루고 있는 수림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경치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팔월의 숲은 엄정하다. 쏟아지는 햇살은 숲의 층위를 관통하며 강렬했던 열정을 제 스스로 식히고 숲속으로 스미어든다. 숲속의 나무들은 제 몸에 필요한 양 만큼의 햇살만을 마신다. 빛들은 허공에서 무한정의 질량으로 쏟아지는 것이어서, 술 속의 모든 나무와 풀과 바위와 이끼들에 골고루 스미어 든다. 나무와 풀과 바위와 이끼들은 다만 그 무한정한 여름의 햇살 속에서 제 몸을 살찌우고 스스로 푸르러 진다. 여름 숲은 그렇게 치열한 자기 성장의 계절이다.


 

제주의 숲은 곶자왈이라 불리워진다. 곶자왈이란 토종 제주말인데,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무와 나무들은 저마다 제 멋을 자랑하며 가지를 뻗고, 가지 사이로 덩굴들이 무성하고, 그 아래로는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고사리와 풀들이 자란다. 죽은 나무 가지에선 숲속의 청소부라 불리는 버섯들이 저마다의 색체로 검푸르고 바위에는 초록의 이끼들이 뿜어대는 태고적 자연의 신비들로 신성하다. 곶자왈은 여름에는 뜨겁고 겨율에도 푸르름을 간직한다. 해서 제주 사람들은 곶자왈을 숨쉬는 땅, 제주의 허파라 부른다.


 



 

곶자왈은 숲을 이루는 경계선의 안과 밖의 온도차가 크다. 나무들이 뿜어낸 습기 때문에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서늘하다. 반대로 겨울에는 난대성 식물이 뿜어내는 열기로 보온효과를 일으켜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때문에 곶자왈은 열대식물의 북방한계선과 한대식물의 남방한계선이 접점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고사리류, 곧 양치식물의 80%가 제주 곶자왈에 자란다. 고사리는 까마득한 고생대 시절부터 비구의 생태계를 고스란히 지켜온 식물계의 원조이다.


 


 

또 곶자왈엔 낙엽수와 상록수가 한데 어우러져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으름난초와 가시딸기, 붓순나무 등 멸종위기에 놓인 식물들이 집단적으로 산다. 소와 말이 방목되는 제주 중산간의 초원을 청정지역으로 유지되는데 일등공신인 환경부 지정 1급 멸종위기종 애기뿔소똥구리도 곶자왈에 둥지를 틀고 아슬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수 많은 곤충과 파충류 때문에 곶자왈은 새들에게도 낙원이다. 한겨울 한라산에서 내려온 산노루 무리들이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곶자왈이 있기 때문이다. 곶자왈은 갈 곳을 잃어 멸종위기에 처한 휘귀식물들의 유일한 피난처이며 제주생태계의 보물창고이다.


 


곶자왈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과 짧은 생을 사다가는 곤충과 동물들의 배설물들은 미생물이나 버섯등에 의해 깨끗이 분해된다. 이 분해된 물질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시 영양분을 간직한 새로운 물질로 변환된다. 이 물질은 숲 속의 식물들의 영양분이 된다. 숲은 그렇게 수 억년의 세월동안 서로에게 먹이가 되고 서로를 먹으면서 순환해 왔다. 곶자왈이 생산해내는 모든 것들은 곶자왈에 존재하는 서로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다. 곶자왈이 버리는 유일한 쓰레기는 신선한 공기와 지하에 흐르는 순수의 물 뿐이다. 공기와 물은 우리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유일한 보은일 터인데, 우리는 아직 그런 곶자왈의 은혜조차 모른다.


 


곶자왈은 본래 오름과 오름 사이에 마그마가 흐르던 용암대지였다. 한마디로 바위덩어리로 뒤덮인 그야말로 황무지와도 같다. 곶자왈을 이루는 바위는 지질학적 용어로 아아용암류라 하는데, 용암의 점성이 큰 게 특징이다. 마그마가 흐를 때 내부마찰이 커서 용암들이 요동을 친다. 때문에 바위 사이로 숨쉬는 구멍, 곧 숨골이 형성되고 바위의 표면은 거칠다. 반대로 점성이 낮은 용암은 내부마찰이 적어 평탄하게 흐른다. 이런 지형을 제주에서는 ‘빌레’라고 한다. 제주 중산간을 이루는 광활한 평원의 성인이다.


 


곶자왈의 숨구멍은 수 많은 물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곶자왈에선 범람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연중 강수량이 가장 많은 제주도에서 홍수가 나지 않는 것은 곶자왈이 가지는 급속한 투수성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곶자왈은 스스로 비를 품고 갈무리한다. 1제곱미터의 순림(純林)의 토양이 끌어안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무려 200리터라고 한다. 이는 제주인의 생명수라 불리는 지하수의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곶자왈이 한 번 끌어앉은 물은 땅속에서 50여년의 세월을 흐르는 동안 제 스스로 정화되면서 물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대지를 뚫고 나온다. 중산간이나 제주 해안에서 흘러나오는 용출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물은 제주에서 삶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의 원천이 되어 왔다. 말 그대로 생명수이다.


 


아아용암으로 형성된 바위 숲은 표면이 거칠고 척박했다. 농경지로 적합하지 못했던 곶자왈은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었고 사람들은 황무지로만 여겼다. 이 척박함 때문에 곶자왈은 오히려 사람의 손길로부터 자유로웠다. 농경지로 개간될 수 없어서 버림받았던 땅 곶자왈은 모든 식물과 동물들이 그리는 생태계의 낙원이 되었다. 사게절 푸르른 상록수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낙엽수들이 숲을 만들었고, 그 숲속에서 온갖 풀과 버섯과 벌레들이 산다.


 


 

곶자왈의 독특한 생태계는 고사리의 낙원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고사리 종족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곶자왈이다. 조사할 때 마다 미기록 고사리가 출현하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만큼의 미기록 식물이 출현할지 아무도 모른다. 고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이다. 그런 식물들의 삶의 언덕이 바로 이 곶자왈이다. 그 낙원에서 새와 한라산의 노루들도 저들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인간의 발길로부터의 자유로움 속에서 곶자왈은 지상 모든 생명체들의 텃밭이자 둥지가 되었다.


 


제주는 돌의 섬이다. 제주가 하나의 큰 돌이다. 돌로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과 집 사이의 경계선도 돌로 쌓았다. 도로의 경계선도 돌이었고, 죽어서도 돌로 테를 두른 무덤에 들었다. 제주사람들은 돌과 함께 살아가고 죽어서도 돌 안에서 잠을 잔다. 돌은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이승과 이승 밖의 세상을 경계하고 관통했던 삶의 동반자였다. 곶자왈은 그런 돌투성이 위에 세워진 생태계의 왕국이다. 돌 중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자갈들이 있다. 이 돌들은 제 몸속에 수분을 간직한다. 화산섬이어서 바람에 쉬 날리는 흙가루를 이 돌들이 붙들어 맨다. 척박하기만 한 돌 땅에서 돌들은 제 몸 속에 간직한 수분을 조금씩 흙에 보내 준다. 이런 돌 땅을 제주 사람들은 ‘지름자갈’이라 불렀다. ‘기름진 돌’이라는 뜻이다. 이런 돌 땅에서는 수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농사에도 좋다. 곶자왈 숲 속에서 습지에만 자라는 희귀식물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돌이 지닌 미덕 때문이다.


 


 

그 낙원은 인간에게도 혜택을 베풀었다. 곤궁했던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은 곶자왈에서 죽은 나무로 땔감을 만들었고 숯을 만들었으며 버섯을 재배하였다. 흉년이 들어 먹거리가 없을 때 곶자왈은 참나무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 주었고, 숲 속에서 자라는 양하는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물이 되었다. 제주도를 온통 죽음의 광란으로 내 몰았던 4․3의 공포 속에서 곶자왈은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곶자왈은 스스로를 지켜왔던 생태계의 평화를 잃고 한 때 고사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만 두면 스스로 아픈 상처들을 스스로 치유하는 날것들의 자생력의 원천을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현재 제주에는 4개의 곶자왈 군단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의 중산간에서 아슬아슬한 삶의 탯줄을 이어가고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 벌판 한 귀퉁이에서 나무와 나무끼리 서로 몸을 얽히며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곶자왈을 관통하며 거미줄 같은 도로가 빼곡히 들어차고 있으며 곶자왈의 경계마다 골프장의 인공잔디들이 곶자왈의 숨통을 옥죄로 죄고 있다. 여기에다 호텔과 콘도미니엄이 야금야금 들어차면서 곶자왈은 고립된 섬으로 변하며 생존의 기로에 섰다. 숲이 아름다운 건 숲에 들어선 개별적 생명들의 어우러짐에 바탕하는 것인데, 인간 중심의 개발로 인해 어우러짐은 파괴되고 곶자왈의 지연성과 순수성은 나날이 상실되고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달래 줄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듯 제주섬이 아름다운 건 섬 도처에 존재하는, 숨쉬는 땅 곶자왈이 있기 때문이다. 흔할 때 우리는 그 흔한 것들이 소중함과 그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 흔해빠진 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 버린 후에서야 그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존재의 흔적을 더듬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곶자왈에 사는 아주 하찮은, 이를테면 그 속에 살던 이끼나 버섯이나 꽃 한송이 심지어 애벌레 한 마리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 거칠은 야성의 세계 속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이다. 그 야성의 먹이 사슬이 온전히 순환될 때 우리의 생의 끈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곶자왈은 제주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이자 영원한 안식처이며 제주생태계의 오아시스이다. 곶자왈은 한라산 오름과 더불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제주 생태 최후의 보루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witseorum/70003033557    오희삼 회원님의 글과 사진입니다. 

*시인 李殷相(1903~1984)은 1937년 한라산 기행문에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곶자왈 숲을 “울림황로(鬱林荒路:울창한 산림과 거친 산길)에 들어와 서니, 한라산이란 밟을수록 오를수록 미궁(迷宮)이요, 황홀경(怳惚境)임을 어찌하랴.”라고 표현하였다.


 

 하산시에는 방아오름의 수림을 지나면서 산간소천(山間小川)을 만났는데, 이 냇물을 건너서면 「모새밭」이라 부르는 곳이 나선다. 「모새밭」이라 함은 사막(沙漠)이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한푼의 사지(沙地), 2푼의 초원(草原), 7푼의 암설(巖屑:바위부스러기)의 광막한 지대이다.


 


 

 우리는 험난한 광야를 횡단하여 무변대공(無邊大空:가 없이 큰 허공) 아래 고함쳐 통곡이라도 한번 시원히 해 보았으면 좋겠다. 저 문호(文豪) 박연암(朴嚥岩:趾源)이 열하(熱河:중국 하북성에 있는 강)를 지날 때 광야에 서서 백탑(白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는 것이 생각난다. 「미인다루(美人多淚) 영웅선읍(英雄善泣):미인은 눈물이 많고, 영웅은 잘 운다」이란 말과 같이 나는 지금 눈물을 지음이 아니요, 고함쳐 울고 싶다는 말이다. 장부(丈夫)의 가슴을 품어 풀어 헤치고 만단고뇌(萬端苦惱:만 갈래의 고뇌)를 여기다 쏟아 놓고서, 하늘과 땅이 마주 울리도록 시원스러이 울고 싶다. 고원 광야의 암설험로(巖屑險路:바위 조각들이 널려 있는 험한 길)에 앉아 대공(大空)을 향하여 통곡하려는 마음은 지금 여기 나만 가진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같이 울 사람이 없고, 내 울음을 알 사람이 없을진대, 혼자 쳐져서 제 혼자라도 울고 싶다. 문득 어디로선지 날아나려 앞길을 덮은 구름과 안개 속을 더듬으면서도 나는 이 통곡의 참뜻을 생각한다.


 


 

 암설(巖屑)의 험난한 길이 끝조차 없다. 방위(方位)도 알기가 어렵거니와 한발로 발 밟을 곳조차 위험하여 여기서 죽은 행인이 많다고 한다. 인생행로가 바로 이 같은 줄을 다시금 생각함에 처연(凄然)한 탄식이 가슴에 서려진다.


 

 그러나 문득 보니 바위 사이 구렁 속에 언제 죽은 무엇인지 백골(白骨)의 토막이 쓰러져 있다. 우리는 깜짝 놀라 지로자(指路者:길 안내인)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방목한 말이 죽은 것인데 군데 군데 이런 백골이 보인다.”고 한다. 길을 잃고 헤메다가 바위를 잘못 밟아 구렁에 빠진 채로 다시 나오지 못하여 비참히 죽은 것이다. 나는 잠깐 죽은 말의 백골 앞에 머물고 서서 조상(弔傷)의 노래를 부르련다.


 



 

 

모새밭 험한 길을

네 어이 헤매더니

구렁에 빠질 적에

오죽이나 울었으랴.

듣고 와서 구할 이 없이

예서 혼자 죽었구나.

비바람 불고 가고

눈서리 치고 가고

껍질도 살도 썩고

백골만 남았구나.

세상에 헛된 것이란

생명인가 하노라.


 

 그렇다. 생명같이 고귀한 것도 없고, 생명같이 위대한 것도 없지마는 생명같이 비천한 것도 없고, 생명같이 무력한 것도 없는 것이다. 한마(悍馬:사나운 말)의 용자(勇姿:용맹스런 자태)가 여기 백골 몇 토막으로 남은 것을 탄식 없이 그냥 보고 지나갈 사람이 누구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이 고행의 암설로(巖屑路)를 지나간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 무슨 장관(壯觀)이 있겠기에 이같이 험난한 길이 오래도록 계속하는고 하였더니 조화의 뜻은 언제 어디서도 심상치 아니하여, 마침내 이르고 보니 기암괴석의 천인동부(千仞洞俯)가 따로 한 왕국을 열고 창쇠(창과 쇠뇌)로 앞길을 막으며 금족(禁足:들어감을 금지함)의 위령(威令)이 내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