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고백장이 던진 파문
1934년 초가을,『삼천리』라는 잡지에 한 여성의 이혼 체험에 관한 글이 실렸다.
「이혼고백장」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로 잘 알려진 나혜석이
전 남편인 김우영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여기에는 그녀가 남편과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과정, 결혼생활, 이혼 과정,
그리고 이혼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최린과의 만남에 대한 소감이 담담히 적혀 있다.
- 나혜석 -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이어서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악취미이며
노출증적 광태이고 자녀교육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출세한 총독부 관료 김우영,
그리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 신파의 거두였던 최린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 스캔들은 세속적인 흥미를 한껏 북돋우며,
두고두고 가심거리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리고 나혜석은 오늘날 '방종하고 향락적'이었다고 비판받는 '신여성'의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중략)
신여성 나혜석
나혜석은 수원의 '나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 최고의 '신여성' 이었다.
1913년 진명여학교 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가 도쿄에 있는 사립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아무리 부잣집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개화된 사람이 아니면 딸을 교육시키지 않았던 시절,
나혜석은 개명한 오빠 나경석 덕분에 유학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외교관 남편과 함께 -
그러나 이 시기의 많은 신여성들이 그랬듯이, 나혜석도 '시집 갈 나이'에 학업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미술학교 2학년을 마치고 귀향했을 때, 아버지는 명문가의 아들과 결혼할 것을 강요하며 학비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혜석은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미술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여주의 한 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결국은 학교를 졸업하고야 말았다. (중략)
슈퍼우먼 콤플렉스
남편 김우영을 만나기 전인 일본 유학시절, 나혜석은 최승구라는 문학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예술과 생활의 동반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최승구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빨리 결혼하라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 속에서 나혜석은, 예술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내 될 사람이 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적극 후원하?다고 나선 김우영과 '우연적으로' 결혼하게 된다.
비록 흔쾌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나혜석은 나름대로 결혼생활에 대한 각오를 갖고 있었다. 평생 사랑해줄 것과 더불어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의 자식과는 별거할 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요구했던 데에서, 결혼으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 각오를 살필 수 있다. (중략)
11년간의 짧지 않은 결혼생활 동안 나혜석은 화가로서, 4남매의 어머니로서, 외교관의 아내로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살림살이를 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전람회에 출품하였고 문필생활을 하는 등 “이 생활에서 저 생활로, 저 생활에서 이 생활로” 그녀의 표현 그대로 “껑충껑충 뛰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중략)
구미여행이 주어진 것은 이 무렵이었다. 어쩌면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연애사건은 슈퍼우먼으로 살고자 했던 강박관념과, 이를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발로한 예정된 '일탈'이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그러나 최린과의 만남은 그녀의 이후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에게 정조를 강요하는 조선 사회가 그녀의 '일탈'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나혜석이 구미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김우영은 사교계에 퍼진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나혜석은 어떻게든 남편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1930년 10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네 아이와 모든 세간을 남겨둔 채 집에서 나와야 했다.
이혼고백장 의 아이러니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에서 정조를 지키지 못했음을 문제삼아 이혼을 강요했던 남편 김우영이 이혼이 성립되기도 전에 다른 여성과 동거에 들어간 사실을 지적하며,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대해 통렬히 비판을 가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나이다.” (중략)
출고 없는 미로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임을 주장”하며 집을 떠난 '노라'에게 가능한 미래는 창녀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의 양자택일뿐이라는 노신의 지적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제도와 인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나혜석은 출구 없는 미로와 같은 막막한 상황 속에 갇히고 말았다. 창녀가 될 수도, 돌아갈 집도 없었던 그녀는 결국 미로 속에서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사회와 조화하지 못한 채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 아닌 유언만이 온몸을 던져 가부장제라는 큰 벽을 부수려다 쓰러져간 한 여인의 짧은 생애의 의미를 되새김질해줄 뿐이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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