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知)만 있고 봄(見)은 없는 지식인들
오늘 새벽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밥만 먹고 살다가 갈순 없다고.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무었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탈과 열반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히루해가 짧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하루가 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안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인가? 갇혀 있는 사람이다. 아무 하는 일없이 밥만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밤은 길 것이다.
"밤이 너무 길어."
이 말은 이번에 고향 내려 가서 들은 말이다.
부산에 사는 사촌 큰형님과 방에서 함께 잤는데 아침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나이가 거의 20년 차이가 난다. 백부의 장형이다. 작고한 어머니와 동갑이다.
큰형님은 왜 밤이 길다고 했을까? 자도 자도 어둡기만 할 때 밤이 길다고 할 것이다. 밤이 길면 인생도 길다고 할 것이다.
주변에서 하나 둘 죽어 갈 때 자신만 살아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밤도 길고 인생도 길다고 느껴질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
잠 못 이루는 자가 있다. 밤새워 공부를 하거나 밤새워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 것이다.
통증이 있는 사람에게도 밤은 길 것이다. 밤이 짧은 사람도 있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이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날이 샐 것이다.
여기 길을 가는 여행자가 있다. 그는 피곤하고 지쳐 있다. 그는 마주 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 묻는다. 조금만 더 가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자에게는 같은 거리라도 두 배, 세 배 멀리 느껴질 것이다.
여기 어리석은 자가 있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고 했다. 어리석은 자는 윤회를 끝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에게 윤회는 계속 된다.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도 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하루하루 감각을 즐기며 살다 보면 어느새 황혼길에 있다. 해는 지고 산그늘 질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두려움이 엄습할지 모른다.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다. 삶의 과정에서 저질렀던 것들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저질렀던 업이 있다. 가벼운 것도 있고 무거운 것도 있다. 아주 무거운 중업은 늘 마음에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업으로 인하여 다음 생이 결정된다.
부처님은 인생의 나그네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므로 나그네가 되지 말고 고통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리.”(Dhp.302)라고 했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의 나그네가 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존재의 윤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한다.”(DhpA.III.462)라고 했다.
나그네길은 윤회의 길이다. 돌고도는 물레방아같은 길이다. 윤회는 어리석은 자들이 가는 길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고,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을 모른다.”(DhpA.II.12)라고 했다.
현명한 자라면 윤회를 끝내는 길로 가야할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다. 통증을 견디며 용맹정진하는 자에게 일각이 여삼추인지 모른다. 피곤에 지친 여행자에게 길은 멀리 있다. 그러나 방향은 정해져 있다. 그 길로 주욱가면 되는 것이다.
길을 가다 보면 숲도 만나고 늪지도 만나고 절벽도 만난다. 그러나 방향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다. 마침내 풍요로운 초원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그곳은 해탈과 열반이다.
방랑자가 될 것인가 여행자가 될 것인가? 윤회의 길로 갈 것인가 열반의 길로 갈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당연히 열반의 길로 가야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이런 정형구가 있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M75)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경이 끝나는 말미에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은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이를 아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아라한 선언은 어떤 의미일까? 아라한 선언은 자신에게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누군가 인가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윤회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거룩한 자, 아라한이 된 것이다. 깨달음의 완성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감명받아 출가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탁발에 의지하며 청정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들은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그들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며 당당하게 아라한 선언을 했을까?
출가를 했지만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생에서 거룩한 자,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불환자가 되어서 정거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수명만큼 살다가 윤회를 끝나기도 한다. 일래자라면 한번 더 와서 윤회를 끝낼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예류자라면 못되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것이다. 범부로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해탈과 열반은 있기나 한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심해 속에 있는 괴생명체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외계인도 없다고 볼 것이다. 정신적 체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선정에 대한 정형구가 무수히 등장한다. 감각만을 즐기는 자에게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네 번째 선정에서는 신통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신통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네 앞에서 보여줘. 그럼 믿을께."라고 말할지 모른다.
정신적 현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통이 의심스럽다면 직접 선정체험을 해보면 될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비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열반이 의심스럽다면 수행을 해서 직접 열반을 체험하면 될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하여 비난한다면 눈이 먼 자나 다름 없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했다. 바라문은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어 고귀한 자가 갖추어야 할 탁월한 앎과 봄을 또한 보고 또한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M99)라고 말했다. 바라문은 깨달음에 대해서 믿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상태를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 믿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신통이나 열반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이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경전은 케케묵은 낡은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영역이 다르다.
물질문명은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문명은 이미 완성되었다. 부처님 당시에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출가했다.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윤회를 끊어 버리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그들은 출가목적을 달성했을까?
회의론자들은 가르침을 의심한다.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비난하고 비방하기까지 한다. 부처님 당시 최상의 지식인 집단인 바라문 집단들이 특히 그랬다. 이에 부처님은 봉사의 비유를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자들은 보지 못한다. 해와 달이 있을 때 해와 달이라는 말은 알고 있으나 눈이 없으니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앎(ñāṇa)은 있으나 봄(dassana)은 없는 것이다. 대개 지식인들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이 "나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M99)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선천적 봉사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여 말할 수 없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통이나 열반과 같은 초월적인 현상에 대해서 부정한다면 마치 선천적 장님이 눈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알고 또한 보아야 한다. 알기만 하고 보지 못하면 선천적 장님과 같다. 앎(知)과 봄(見)에 대해서 장님과 어린아이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장님은 신호등의 푸른색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나 눈이 없어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건너갈 수 없다. 앎만 있고 봄은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신호등의 빨강색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빨강색에서 건너다가 사고날 수 있다. 봄은 있지만 앎은 없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봉사와 같고 어린아이와 같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앎과 봄을 갖추었다. 알면서 동시에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알기만 하고 보지 못하면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와 같다. 지식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지식인들은 많이 아는 자들이다. 그러나 실천이 없다면 눈 먼 장님과 같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령 지구 반대편에 원시부족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정신세계는 어떠할까?
초기경전에는 마음, 업, 저 세상, 윤회, 신통, 열반 등 정신세계에 대한 것이 많다. 이를 물질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한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눈으로 보아서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부처님은 이런 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선천적 봉사와도 같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서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M99)라고 했다. 앎만 있고 봄은 없는 지식인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요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틈만 나면 열어 본다. 어떤 이는 과학의 시대에 케케묵은 경전을 보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전에서 지식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전에서 지혜를 찾고자 한다. 이미 이천오백년전에 완성된 정신문명에 대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갔던 길을 나도 따라 가고자 하는 것이다.
하루해가 짧다. 하지 때라서 해가 길지만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감각만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세월도 빨리 흘러갈 것이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인생의 끝자락에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이대로 보낼 수 없다. 무언가 하나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경전을 읽고,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늘 감각의 대상에 가게 되어 있다. 늘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는 사띠하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 ñāṇadassana)하는 것이다. 항상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야 한다.
2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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