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척 억울할 것 같다.
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욕락을 마음껏 누려 보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말한 것이 있다. 이제 죽어도 원 없다는 말이다. 할 것 다해 봤다는 의미가 크다.
할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맛 있는 것 원없이 먹어 보았다는 것 등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원없이 맛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가 있다. 노년의 성을 다룬 영화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죽어도 좋은 것이다.
맛 있는 것을 원없이 먹어 보았다면 죽어도 좋은 것이다. 해외여행을 원없이 해 보았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한다.
눈과 귀, 코, 혀, 몸으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을 대상으로 하여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즐긴다.
거의 대부분 이렇게 산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나는 것 같다.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의 극복을 말씀하셨다.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의 위험과 재난을 말씀하셨다.
특히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여유 계층에 대해서는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질 염려가 더 크다고 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먹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늘 맛있는 것을 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먼저 식탐부터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말씀하셨다.
항상 감관을 수호하고, 음식절제를 하고, 깨어 있음에 철저하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라고 했다.
음식절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부처님은 하루 한끼만 먹을 것을 말씀하셨다.
이를 때 아닌 때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
밤에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긴다."(M70)
부처님은 밤에 먹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세 끼를 다 먹었다.
그러다 두 끼를 먹게 되었고 마침내 한끼만 먹게 되었다.
이것은 율장에서 오후에 먹지 않는 계율이 되었다.
음식절제 하는 것 하나만 잘해도 수행을 잘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수행처를 가보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집중수행을 하면 오후불식한다. 이는 매일 새벽 법회에서 팔계를 받아지니기 때문이다.
팔계에 음식절제에 대한 항목이 있다.
이는 “하루 한끼의 식사를 하고 밤에 식사하는 것을 삼가고 때 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간다.”(A8.42)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하루만큼은 출가수행자처럼 살라는 것이다.
재가자가 받는 팔계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포살의 날에 재가자가 팔계를 받아 지니면 그 유효기간은 하루낮과 하루밤에만 해당된다.
그래서 재가자의 팔계에 대하여 하루낮하루밤계라고 한다.
수행처에서 새벽법회 때 매일 팔계를 받아 지녀야 하는 이유가 된다.
수행처에서 오후불식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오후에 먹지 않으면 배고파 죽을 것 같은데 실제로 시행해 보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이 말씀한대로 하루 한끼만 식사하면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긴다."(M70)라는 말이 맞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탐욕이 누그러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감각적 욕망이 무디어짐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줄이는데 있어서 음식절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는 것 같다.
정오 이후 다음날 해 뜰 때까지 일체 먹지 않았을 때 욕망은 누그러진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은 욕망을 채워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내려 놓음으로 인하여 해소된다.
성욕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면 채워야 할까? 욕망을 채움으로서 해소하는 방식은 세속적이다.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때 아닌 때 먹지 말라고 했다.
또 탁발하라고 했다. 음식에 대한 탐욕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음식절제가 되지 않으면 청정한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수행자가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면 수행자라고 말할 수 없다.
재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밥의 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하루 세 끼가 아니라 다섯 끼도 먹는다.
출가수행자가 재가자처럼 세 끼 먹고, 간식도 먹고, 야식도 먹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는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다음으로 그 사람이 밥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젓가락 놀리는 것에서 탐욕을 볼 수 있다.
꼬박꼬박 끼니 챙겨 먹고 간식도 먹고 야식도 먹는다면 그는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달은 자는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인 자를 말한다. 탐욕은 음식절제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냄은 화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탐, 진, 치 삼독 중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어리석음이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방법이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 그런가?
어리석다는 것은 삿된 견해에 빠져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십선행과 십악행을 설했다. 십선행과 십악행에서 열번째 항목은 사견에 대한 것이다.
정견을 가졌으면 선행이 되고 사견을 가졌으면 악행이 된다. 이는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여기 한소식 했다는 사람이 있다. 그가 깨달았는지 알아보려면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하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연기법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면 사견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탐욕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에게도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외도 싼다까가 "해탈한 자라도 감각적 욕망을 즐깁니까?"라며 아난다에게 물어보았다.
이에 아난다는 해탈한 자에게는 다섯 가지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
"즉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고의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습니다.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주지 않는 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음행을 할 수 없습니다.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은 마치 전에 집에서 살던 것처럼 재물을 쌓아놓고 감각적 쾌락을 누릴 수 없습니다."(M76)
아난다는 오계를 말했다. 깨달은 자는 오계를 어기는 일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불음주계 대신에 감각적 욕망이 들어가 있다.
깨달은 자는 오욕락을 즐기는 삶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깨달은 상태는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어떤 감각적 쾌락도 즐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빠졌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더이상 깨달은 자가 아니다. 예전의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에 있는 자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번뇌가 소멸된 자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의문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netaṃ ṭhānaṃ vijjati)”(A6.13)라고 했다.
이 말은 "그 상태로 있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해탈자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탈자가 화 내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 훌륭하게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그의 마음을 묶고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6.13)라고 했다.
흔히 자비의 분노를 말한다. 훈계하기 위해서 화를 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민의 마음을 낼 수는 있지만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토한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해탈자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탐욕이나 분노, 사견을 가질 수 없다.
만약 그가 화를 내거나, 음식절제가 없거나, 자만에 가득 차 있다면 그는 토한 음식을 먹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토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매일 토한 음식을 먹고 사는 자들과 같다.
오욕락으로 사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죽어도 좋은 것이다.
정말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저 세상이 없다면 안심할 것이다.
저 세상이 있다면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저 세상이 있든 없든 오욕락으로 사는 삶은 괴롭다.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해서 괴롭다.
즐길거리를 찾다 보면 갈증만 날 뿐이다.
결국 집착이 되어서 절망하게 된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즐거움에 대한 갈애는 집착이 된다.
그래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하루라도 초기경전을 읽지 않으면 마음은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는 것 같다.
매일 토한 음식을 먹는 것 같다. 늘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는 것이 사띠일 것이다.
이렇게 새벽 1시 반에 깨어서 새벽 4시 13분까지 엄지로 쳐 보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만약 오늘 죽음을 맞이한다면 억울할 것 같다.
2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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