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지지 않는 즐거움 느껴지지 않는 행복
마음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나의 영역을 떠나는 것 같다. 나의 영역을 떠나서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 같다. 특히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그렇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욕락에 대한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대한 것이다. 매혹적인 형상과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것도 감각적인 욕망에 따른 것이다. 음식에 대한 갈애는 오욕락이 총동원 되어서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것이다. 성적욕망은 말할 것도 없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충족될까?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갈증만 날 뿐이다. 무엇보다 허무하다는 것이다. 오래 지속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에 목숨을 건다. 죽어도 좋은 것이다.
세상에 감각적인 즐거움 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 먹는 즡거움 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사람이 오욕락으로 살면 다른 즐거움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거친 감각적 즐거움 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 그것은 감각적 즐거움을 여읜 즐거움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것에 있어서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 같다. 세상사람들은 오욕락을 즐기지만 부처님은 오욕락을 여의라고 했다. 거친 즐거움 보다는 미세하고 잔잔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어떤 즐거움인가? 그것은 선정의 즐거움이다. 초선정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
위와 같은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선정에 들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가장 먼저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것(vivicceva kāmehi)'이다. 이것이 되지 않고서는 선정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잔잔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거친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역설이다. 항상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역류도라고 한다.
역류도로서 부처님 가르침은 행복에 대한 것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하지만 부처님은 감각을 여읜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선정의 행복을 말한다.
아직까지 선정 체험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선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것 같다. 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호흡을 볼 때가 있다. 또한 어느 때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장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이런 것도 즐거움이고 이런 것도 행복일 것이다. 누구나 조금만 집중하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선정의 예비단계라고 볼 수 있다.
어느 것에든지 집중하면 번뇌가 사라진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 행복이다. 독서삼매도 행복이고 글쓰기 삼매도 행복이다. 암송하는 즐거움도 행복이다. 이런 행복은 오욕락과 다른 것이다. 감각의 행복이 아니라 감각을 떠난 행복이다. 하물며 선정의 행복은 어떠할까?
즐거움에는 감각적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즐거움이 있다.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이 뭇삶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어떠한 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M59)
중생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오욕락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에스엔에스에 한상 가득 차린 먹거리를 올려 놓는다. 먹방보다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욕락을 뛰어 넘는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선정의 즐거움이다.
초선정보다는 2선정의 즐거움과 행복이 더 크다. 그런데 4선정에서는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4선정 정형구에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M59)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여의었는데 즐거움이 있을까? 이 말은 "행복을 여의었는데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끼?"라며 묻는 말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가르침은 계속 내려 놓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대상을 버림에 의한 즐거움, 내려 놓음에 대한 행복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네 번째 선정에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부처님이 일종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멸이나 적멸은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느껴진 즐거움과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의 두 개의 즐거움이 있는데,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은 열반과 관련된 것이다. 여래는 괴로움이 없다는 의미에서 두 가지를 모두 즐거움이라고 묘사한 것이다."(Pps.III.115)
여기서 즐거움은 행복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즐거움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ukha)는 pleasure의 뜻과 happy의 뜻 모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감각적 즐거움과 감각을 여읜 즐거움이 있다. 감각을 여읜 즐거움은 선정의 즐거움을 말한다. 그런데 느낄 수 없는 즐거움도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즐거움, 즉 행복마저 사라져 평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이와 같은 평정에 대하여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상태라고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정한 상태는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하다. 이를 우뻭카라고 한다. 그런데 우뻭카는 선정 바깥에도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평정한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뻭카는 언제 깨질지 모른다.
범부의 평온이 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대상에 따라 금방 깨진다. 즐거운 느낌이 되거나 괴로운 느낌이 된다. 마치 아기가 웃었다 울었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네 번째 선정에서 우뻭카는 견고하다. 이는 사띠가 있는 평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번째 선정의 평정을 우뻭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고 하는데, 이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는 지극히 청정함 '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극히 청정한 상태가 행복이다. 이런 행복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여읨으로서 성취되는 행복이다. 여기서 행복은 즐거움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을 여의는 즐거움이 된다. 그런데 느낌마저 소멸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수멸정이다.
상수멸정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열반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라고 했다. 또한 가르침의 장군 사리뿟따는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열반은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럼에도 열반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역설적으로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매력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역류도이고 동시에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가 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래서 범부의 느낌이다. 그러나 수행자의 평정은 견고하다. 사띠가 있기 때문에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상태가 되지 않는다. 설령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상태에 가 있더라도 금방 알아차려서 평정상태가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정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마저 소멸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열반의 상태이다.
율장 소품을 보면 싸끼야 족의 왕족 출신 밧디야가 있다. 왕으로 살다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부처님의 제자를 말한다. 그런데 밧디야는 말끝마다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 (aho sukhaṃ, aho sukha)"라며 말하고 다녔다.
밧디야는 왜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을까? 이에 주변의 수행승들은 의문을 품었다. 밧디야가 예전에 왕위에 있었을 때의 행복을 추억하면서 말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밧디야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다. 이에 부처님은 밧디야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 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그러자 밧디야는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왕이었을 때는 내궁에 있어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고, 외궁에 있어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고, 성안에서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고, 성밖에서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고, 나라 안에서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고, 나라 밖에서도 호위들이 엄하게 지켰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호위받고 수호받아도,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의심하고 전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서 숲속으로도 가고 나무 밑으로도 가고 빈집으로도 가도, 두려워 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전율하지 않고 평안하고 순조롭고 안정되고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지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의미에서 제가 숲으로도 가고 나무 밑으로도 가고 빈집으로도 가서 이와 같이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라고 자주 감흥어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율장소품 7장 참모임 분열의 다발, 여섯 명의 싸끼야 족의 출가)
밧디야는 선정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왕으로 살았을 때 보다 비교되지 않은 즐거움을 맛본 것이다. 왕으로 살았을 때는 감각적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각적 즐거움을 뛰어 넘는 행복을 맛보았을 때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여긴다. 한상 가득 차려 놓고 먹는 것도 행복이라고 말한다. 먹방 채널이 유행하는 것도 보통사람들의 행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뛰어 넘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선정의 행복이다.
감각의 행복이 거친 것이라면 선정의 행복은 미세하고 잔잔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즐거움 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M59)라고 했다. 그런데 더 탁월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이는 네 번째 선정과 상수멸정의 상태를 말한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는 느낌의 상태가 된다.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고 행복을 느낄 수도 없음에도 행복한 상태라고 했다. 상수멸정에서는 느낌마저 소멸되어 느낄 수 없음에도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느껴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것이다. 느낌이 없는 행복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니까야를 통해서 안 것이다.
요즘 매일 니까야를 읽고 있다. 전에는 필요할 때만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니까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해야 하는 것이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늘 편한한 자세로 열어 본다. 주석까지 빠짐없이 정독한다. 중요 부위는 칠해 둔다. 오자나 탈자 등이 발견되면 즉시 전재성 선생에게 알려 준다. 다음 개정판에 반영될 것이다.
현재 맛지마니까야를 693페이지까지 읽었다. 맛지마니까야는 총 1,600여 페이지에 달한다. 이런 속도라면 두세달 걸릴 것 같다. 마치 대륙을 횡단하는 것 같다.
에스엔에스에서 호주대륙을 오토바이로 횡단하는 페이스북친구가 있다. 하루에도 여러번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려 온다. 서너달 일정인 것 같다.
나는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음로서 가르침의 대륙을 횡단하고자 한다. 단지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겨 두고자 한다. 다음 번에 볼 때는 노랑 형광메모리칠한 부위만 보면 된다. 특히 기억해 두어야할 구절은 분홍색 메모리칠 해 놓았다.
오늘 느껴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글을 썼다. 이런 것도 오래 기억해 두기 위한 것이다. 나는 현재 맛지마니까야 읽기 대장정을 하고 있다.
20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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