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승원의 삶이 저절로 고귀한 삶을 보장할까?

황령산산지기 2022. 5. 1. 14:49

승원의 삶이 저절로 고귀한 삶을 보장할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늘 질문해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개나 돼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오로지 감각에만 의지하는 삶이다. 그 중에서도 먹는 것이다.

먹고만 살 수 없다. 포만감이 생기면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아마 형상의 즐거움을 찾을지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다. 유튜브 시청하는 것도 해당된다. 에스엔에스 마실 다니는 것도 해당된다.

형상의 즐거움에서 싫증나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소리의 즐거움을 찾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같은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감각을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감각의 노예가 되어 산다. 초기경전에서는 '악마의 낚시바늘을 물었다'라고 표현된다.

물고기가 어부의 낚시바늘을 물었다면 어떻게 될까? 어부의 손에 달렸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 악마의 낚시바늘을 물었다면 어떻게 될까? 악마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요즘 낙이 생겼다. 그것은 경전 읽는 것이다. 틈만 나면 읽는다. 머리맡 맛지마니까야를 말한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하루 한경이면 된다. 152경이니 120경가량 남았다. 네 달 후면 다 읽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오토바이로 대륙을 횡단한다. 이를 생중계하듯이 실시간으로 에스엔에스에 올린다. 어떤 이는 농사를 짓는다.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 모종을 심는 등 농사일을 사진과 함께 에스엔에스에 올린다. 모두 목표가 있는 삶이다. 나의 단기목표는 맛지마니까야를 완독하는 것이다.

읽기와 쓰기, 외우기와 암송하기 어느 것이 좋을까? 모두 다 좋다. 한가지나 두가지만 하면 재미없을 것 같다. 네 가지 모두 특징이 있다.

읽었으면 써야한다고 말한다. 외웠으면 암송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언어적 행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암송으로만 끝난다면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Dhp.19)

 


읽기와 쓰기, 외우기의 최종단계는 암송하기라고 볼 수 있다.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송한다. 그런데 암송으로 그치면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혹시 나는 남의 소만 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의 담마를 암송하는 것은 남의 소를 세는 것이 아니다. 암송하는 것 자체가 수행인 것이다. 어떤 수행인가? 사마타수행이다. 암송을 하면 정신이 고도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남의 소를 세는 사람이 있다. 출가자이면서 본업보다 부업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다. 설령 그가 부업에 제아무리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취미생활 하자고 출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업은 뒷전이고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취미생활에 올인하는 삶을 산다면 언제 어느 세월에 담마를 공부할 것인가!

재가자이면서 출가자처럼 살고자 한다. 출가수행자보다 더 수행자답게 살고자 한다. 틈만 나면 경전을 읽고 읽은 것을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새겨야 할 것은 외운다. 외운 것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송한다.

재가자이지만 출가자보다 더 출가자답게 살고자 한다. 구족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계가 아닌 팔계로 살고자 한다. 오후불식하는 것 하나를 제외하고 지키고자 노력한다.

절에서 산다고 하여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신선같이 산다고 하여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저자거리에 있거나 산중에 있거나 늘 있는 것이다. 절에서 산다고 하여 저절로 고귀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대상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이 있다.”(M26)

오욕락 중에서 시각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청각, 후각 등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와 같은 오욕락은 절에서 산다고 해서 극복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벗들이여, 만약 어떤 수행승을 다른 자가 꾸짖고 질책하고 분노하여 상처를 준다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이 청각의 접촉으로 괴로운 느낌이 생겨났다. 그것은 조건으로 생겨났으므로 조건이 없으면 소멸한다.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는 ‘접촉은 무상하다.’라고 보고,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보고, ‘지각은 무상하다.’라고 보고, ‘형성은 무상하다.’라고 보고, ‘의식은 무상하다.’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이 대상의 세계가 무상함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 신뢰와 안정과 해결을 얻습니다.”(M28)

 

이와 같은 가르침은 담마를 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상처를 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에 분노하지 않고 연기법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소리가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조건발생했음을 말한다. 그런데 조건발생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일어나자 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찰라멸이다. 이와 같이 법이 무상함을 알았을 때 집착할 것이 없다.

 

소리는 파동이다. 소리가 나기 위한 조건이 발생했을 때 소리가 난다. 소리를 단지 소리로, 파동으로 인식했을 때 그가 비난하고 욕설을 퍼부어도 태연할 수 있다. 소리는 일어나자 마자 사라졌고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만 남았다면 그 인식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이는 소리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신체는 주먹을 접촉하여 공격받고, 흙덩이를 접촉하여 공격받고, 몽둥이를 접촉하여 공격받고, 칼을 접촉하여 공격받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톱의 훈계의 비유에서 ‘수행승들이여, 만약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도적들이 잔인하게 그대들의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그때에 만약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야 나의 정진은 피곤함을 모를 것이고, 새김은 안정되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고, 몸은 맑아지고 격정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은 집중되고 통일될 것이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 몸을 주먹으로 접촉하여 공격하고, 흙덩이로 접촉하여 공격하고, 몽둥이로 접촉하여 공격하고, 칼로 접촉하여 공격하도록 내버려두자. 왜냐하면, 이것이 부처님들의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압니다.”(M28)

 

이번에는 주먹으로 맞은 것이다. 소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톱의 비유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공부는 초기경전, 특히 니까야를 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초기경전을 읽고,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초기경전에서 새겨야 할 것을 외우고, 외운 것을 암송하는 것은 실천적 수행의 바탕이 되고 동시에 수행 그 자체가 된다.


무심코 하늘 한번 처다 보는 것이 탐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업인 담마를 공부하는 것보다 아마추어 취미생활에 불과한 부업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일종의 갈애에 따른 탐욕이다.

절에 산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거리에 있더라도 항상 부처님의 담마와 함께 하면 그 곳이 절이다. 부처님의 담마는 읽기와 쓰기, 외우기와 암송하기로 완성된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담마에 대한 공부도 궁극적으로는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이 있어서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고 전승되어 왔다.

내가 읽기, 쓰기, 외우기, 하는 것은 담마에 대한 최상의 공부방법이다. 대륙횡단하는 것보다 더 좋고 농사짓는 것보다 더 좋다. 그 시간에 한페이지라도 더 읽고, 읽은 것을 글로 표현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새겨야할 것은 외워서 내것으로 만든다. 나에게 담마를 읽고 쓰고 외우고 암송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수행이다.


20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