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듣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황령산산지기 2021. 11. 7. 08:28

듣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듣는다는 것은 여기 아무런 사념(思念)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듣는 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각성(自覺性) 속에서, 전적인 깨어있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다 마련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그대는 들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 앉아 내 얘기를 듣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마음은 안에서 미치광이처럼, 쉼 없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는 미치광이처럼 자리를 옮겨 다닌다.

마음은 수천 가지 사념의 실들을 자아내며, 마음은 끊임없이 미래로 과거로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마음은 쉬지 않고 사념의 구름들을 데리고 와서는 그대 존재의 티 없는 하늘을 가린다.

마음은 여기 이 순간 속에는 있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로 미래로 돌아다닌다.

 

그러니 그대 어떻게 내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무엇을 듣고 있든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다고 해도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듣고 있을 것이며,

내가 말하는 것을 줄곧 흘려보내기만 할 것이다.

물론 듣기는 들을 것이다.

귀머거리는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짜 듣는 게 아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끝없이 이렇게 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눈 있는 자는 보라.”

 

물론 예수의 제자들은 귀머거리도 장님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지금 그대가 달고 있는 것과 똑같은 좋은 눈들을 갖고 있었다.

그대에게 매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귀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은 그다지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충분한 이유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앉혀 놓고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쉬지 않고 그들의 주의를 밝게 돌려야만 했고, 잘 들으라고 외쳐야만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개의 뜻으로는 잘 듣는다는 것은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듣고 있으면서 그대가 마음속에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그대가 끼어들어 그대의 잼대로 끊임없이 재고 있다면,

그대가 혹시, “그렇다. 이것은 내 생각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니 옳다.

그러나 저것은 내가 보기에 논리적이지 못하므로 옳지 않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그럴듯하지만 저것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래서 혹시 그대가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그와 같은 꼬리표를 매달고 있다면,

비록 그대가 듣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잘 듣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는 동안에 그대의 과거의 마음은 줄곧 끼어들어 요모조모 재고 금을 그어 놓는다.

그렇게 재고 금을 그어 놓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지나온 과거이다.

이전에 그대는 몇 가지를 읽었고,

몇 가지를 주워들었으며,

몇 가지 울타리들을 그대 주위에 세워 놓았다.

끊임없이 끼어들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과거이다.

과거는 자신을 언제까지나 살려 두기를 바란다.

과거는 무언가 낯설고 처음 보는 것이 들어와서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그대가 자로 재고, 헐뜯으며, 말싸움을 하고, 서로 잡아당길 때 하는 작업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은 낡은 것, 무덤이다.

죽어 있는 것은 편하다.

죽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대는 어느 때나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이미 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는 것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음은 늘 죽어 있는 것, 낡은 것,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것, 어린애와 같이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것, 미지의 것이 들어오면 문을 닫아 버린다.


어린이 처럼 들어 보세요~~

정확이 듣는다는 것은 복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을 뜻한다.

이 ‘복종(obedience)'이란 말은 무척 아름다운 말이다.

‘복종(obedience)'이라는 말의 어원이 ’obedire'라는 것을 알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obedire'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듣는다. ‘ 는 뜻이다.

왜인가?

복종이 곧 철저하게 듣는다는 것을 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두 가지는 같은 뜻이다. 그렇다.

그것들은 동의어(同義語)다.

전적으로, 철저하게 듣는다면 그대는 복종할 것이다.

만일 거기 진실이 담겨 있다면 그것에 복종할 것이다.

그대 편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안 내리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실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한번 그 진실을 듣고 나면 그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적으로 그것에 따르게 된다.

일단 듣기만 하면 그대는 자연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그래서 ’복종‘이라는 말이 ’철저하게 듣는다. ‘라는 어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유태 전통에서는 ‘복종’이란 ‘귀를 드러내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진짜 그대의 귀를 열었다면,

거기 어떤 자물쇠도 귀마개도 없다면,

거기 어떤 곳으로부터의 유혹도 없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귀만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가슴 또한 열린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씨앗이 그 가슴 밭에 떨어지면 오래지 않아 그 씨앗은,

그 진리의 씨앗은, 싹이 트고 나무가 되어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 씨앗이 나무로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언젠가는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그대 만일 진리를 들었다면 그대는 그 진리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단 진실을 듣고 나면 거기 그것을 피해 달아날 길이라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마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해 달아나기를 바란다면 애초부터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실은 마치 태양과 같은 것이라서 일단 그것을 한 번이라도 보고 나면 그대의 눈은 그 빛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컴컴한 동굴 속에 갇혀 홀로 지내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태양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음은 이러한 사실을 환히 알고 있다.

한번 듣기만 하면 그대는 그것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되면 달아날 길이란 없다.

진실을 알자마자 그대 안에는 어떤 계율이 만들어진다.

그대는 그것에 따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자신을 억지로 끌고 가서가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귀를 막고 있는 자물쇠를 뜯어내 버려야 한다.

귀를 막고 있는 자물쇠란 무엇을 말하는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 자물쇠이다.

그대는 진실을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죄다 거짓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진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대가 “나는 진실을 알고 싶다.”라고 말한다 해도,

실제로 그대는 언제나 그렇게 입을 벌려 떠들고는 있지만 그대는 여전히 진실을 두려워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거짓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이 다가오면 그 모든 거짓들은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온통 독차지하고 있다.

어둠이 태양을 두려워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그대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마음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 마음은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할 것이다.

그대가 진실을 들을 수 없게끔 마음은 그대 둘레에 구름의 장막을 두텁게 드리워 놓을 것이다.

 

귀를 막고 있는 자물쇠를 벗어 버려야만 한다.

그 자물쇠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대는 두려움 때문에 문을 처닫고 있다.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진리를 찾지 못하리라고 붓다는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두려움의 구름을 헤치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 한 그대는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자, 한번 보라. 그대의 종교인들을, 그 종교들이 해 온 짓거리들을 한번 보라.

소위 그대의 모든 종교들은 죄다 두려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종교들은 죄다 두려움에서 생겨난 종교들이다.

 

그러나 거기 두려움을 통해 진리로 이르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 두려움의 구름이 걷혀졌을 때에만 그대는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대가 절이나 교회나 모스크(회교 사원)로 가서 돌멩이나 경전이나 여러 전통들을 앞에 모셔 놓고

엎드려 절을 할 때, 한번 자신을 주시해 보라.

그렇게 절을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대 내면을 한번 주시해 보라.

들여다보라.

그때 그대는 마음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두려움들을 발견할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그대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모두 두려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믿음이란 오직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때에만 믿음은 그대 안에서 꽃피어난다. 그때에만 그 향기는 그대를 적실 수 있다.

 

믿음은 오직 두려움의 재 위에서만 피어난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한다.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거기 있으면 그대는 언제나 판단을 하며,

언제나 계산을 하고,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면서 둘레에다 벽을 둘러칠 준비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그대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결코 문을 활짝 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재빨리 문을 닫을 것이다.

 

믿음은 바로 신뢰다.

그리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뢰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신뢰하기 위해서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도 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어제 나는 ‘위기(危機)’라는 중국의 한자를 보고 그것에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위기’라는 중국의 표의 문자는 두 개의 상징을 그 안에 담고 있다.

하나는 위험한 상황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기회를 뜻한다.

그렇다. 위기의 순간은 그대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를 머뭇거리면 그대는 그것이 주는 기회까지도 잃고 만다.

기회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위험 속에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 그들만이 곧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귀를 막는 자물쇠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두려움이다.

그 외에도 그 자물쇠를 만들어 내는 요소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모든 것들 또한 이 두려움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판단이나 말싸움이나 과거에의 집착이나,

아니면 그대 존재 안으로 새롭고 낯선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나 모두 이 두려움으로 해서 생겨난다.

 

수많은 언어 형태들이 있지만 어떤 언어에서나 복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모두 듣는다는 말의 강력한 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듣는 것, 한 치의 틈도 없이 전적으로 듣는 것이 곧 복종하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 있다.

 

한 가지를 더 얘기해 보자. ‘터무니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대는 그 말이 ‘복종’이라는 말의 정확한 반대말이라는 것 알면 놀랄 것이다.

‘터무니없다.’ 라는 말은 ‘완전히 귀먹다.’라는 뜻이다.

어떤 것이 터무니없다 하고 말하는 것은

곧 ‘나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터무니없어 하는 대신 전적인 복종으로 바꾸어 놓으라.

그것은 곧 그대의 귀를 드러내는 것이 되고, 그때 그대는 완전히 열릴 것이다.

 

- 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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