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기꺼이
죽음명상 다섯 게송을 모두 다 외웠다. 오늘 새벽 잠에서 깨어 앞서 외운 네 개의 게송을 암송했다. 먼저 외운 것을 확인하고 그 다음 게송 외우기로 들어가야 한다.
시간은 몇시인지 모른다. 경행하듯이 좁은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실마리만 찾으면 그 다음은 자동이다. 게송의 첫단어만 떠올리면 그 다음은 줄줄이 나오게 되어 있다.
죽음명상 네번째 게송은 법구경 마음의 품에 있는 41번 게송과 병행한다. 바로 이전에 외웠던 것으로 거저 먹기가 되었다.
법구경 41번 게송이 왜 죽음명상 4번 게송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우리 몸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버릴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라고 노래 했을 것이다.
사람 몸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의식이 떠난 몸은 마치 나무토막 같을 것이다. 전쟁영화를 보면 시체가 쌓여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병사들은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무언가 먹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생명의식이 떠난 몸은 나무토막 같아서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된다.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서 태워버리거나 매장할 것이다.
죽음명상 다섯번째 게송은 무상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어느 것 하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상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야와야담미노
웃빠짓뜨와 니룻잔띠
에상 위빠사모 수코"
빠알리어를 우리말로 음역해 놓은 것이다. 이게송은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라고 풀이 된다.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다.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를 가리지 않고 오래 전부터 애송되어 왔다. 특히 이 게송은 천도재 때도 활용된다. 보통 무상게라고 말한다. 한자로는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무상게를 접했을 것이다. 이는 무상게가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와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는 동자가 어느날 야차가 읊은 전송을 들었다. 동자는 매우 감명 받았다. 후송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야차는 목숨을 요구 했다. 자신의 밥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동자는 후송을 알기 위해서 기꺼이 야차의 밥이 되기로 했다. 야차가 후송을 읊자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 한몸 기꺼이 던질 수 있음을 말한다.
무상게는 전송과 후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문게송을 보면 전송과 후송은 공통적으로 생멸(生滅)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생멸과 뒷생멸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전송의 생멸은 제행무상에 대한 것이고, 후송의 생멸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한문게송을 보면 모두 생멸로만 표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반면 빠알리 게송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빠알리게송에서 앞생멸은 "웁빠다야와야담미노(uppādavayadhammino)"이다. 이 말은 세 단어가 결합되어 있는 복합어이다. 풀이하면 uppāda+vaya+dhamma가 된다. 여기서 웁빠다는 'rising'의 뜻이고, 와야는 'age; loss; decay'의 뜻이다. 이는 제행무상과 관련된 생명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생멸이다.
빠알리게송에서 뒷생멸은 "웃빠짓뜨와 니룻잔띠(Uppajjitvā nirujjhanti)"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앞생멸을 뜻하는 'uppādavayadhammino'와 다르다. 단어가 다른 것이다. 쓰임새가 다름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태어남에 대한 것이다. 이는 뒷생멸에 태어남을 뜻하는 자띠(jati)의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뒷생명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을 말한다. 고고성은 괴로움 그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괴고성은 변함으로 인한 괴로움이고, 행고성은 무상함에 대한 것이다. 또한 고고성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고통에 대한 것이고, 괴고성은 변화로 인한 불만족한 상태를 말하고, 행고성은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무상에 대한 것으로 우주적 스케일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무상게의 구조를 보면 전송은 행고성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닛짜 와따 상카라(Aniccā vata saṅkhārā)'라는 말이 결정적이다. 이를 제행무상이라고 번역했다. 제행무상은 우주적 스케일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이는 웁빠다야다와다담미노(uppādavayadhammino)라는 말로 표현된다.
무상게 전송이 제행무상의 우주적 스케일의 생멸이라면, 후송은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단어에서 나타난다. 왜 그런가? "웁빠짓뜨와 니룻잔띠(Uppajjitvā nirujjhanti)"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웃빳자(uppajja)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having been born'의 뜻이다. 오온에서 현상이 생겨남을 뜻한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웁빳자 다음에 니룻자띠(nirujjhati)라고 했다. 이는 'ceases; dissolves; vanishes의 뜻이다.
무상게에서는 오온의 생멸을 그치는 것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에상 뷰빠사모 수카(esaṃ vūpasamo sukho)'로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에상(esaṃ)은 아양(ayaṃ)과 같은 말로서 'this person'의 뜻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상게 후송은 오온의 생멸을 그침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꼰당냐가 이해 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무상게와 일치한다. 꼰당냐는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 설법을 듣고서 제행무상과 오온무상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법안이 생겨났다고 했다.
무상게는 법안이 생겨남에 대한 게송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주와 자신에게서 생멸의 이치를 알았을 때 더 이상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특히 오온에서 생멸이 그쳤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최상의 행복이다.
무상게는 최상의 행복에 대한 게송이다. 최상의 행복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이는 오온의 생멸이 그침으로 실현된다.
무상게 대미는 적멸위락(寂滅爲樂)으로 장식된다. 오온의 생멸이 그쳤을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설산동자가 몸을 날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죽음명상 다섯 게송을 오늘 새벽 다 외웠다. 이전에 외운 게송을 확인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마지막 게송을 외웠을 때 전체 게송을 다 외우게 된다. 이제 죽음명상 다섯 게송을 외웠으니 이후부터는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암송해야 한다.
게송을 암송하면 암송의 기쁨이 있다. 마치 사마타 수행하는 것과 같다. 절수행하는 사람이 108배 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좌선할 때 느끼는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감각적 즐거움과는 다른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애써 힘들게 성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동적이고 소극적 방식으로 얻어진 감각적 즐거움은 거친 것으로 일시적이다. 금방 싫증이 나서 또다른 감각적 대상을 찾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마음이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이다.
게송을 암송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큰결심을 해서 애써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성과는 꽤 오래간다. 이를 잔잔한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죽음명상 다섯 게송을 외웠으니 암송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한다. 하루 한번이상 일주일 이상 암송하고자 한다. 다음에 꼭 외워보고 싶은 게송이 있다. 그것은 십이연기를 말한다.
흔히 불교의 근본교리에 대하여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라고 말한다. 사성제는 2013년 초전법륜경(S56.11) 외울 때 다 외웠다. 팔정도는 작년 팔정도경(S45.8)을 외울 때 다 외웠다. 이제 십이연기만 남았다.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12.2)에 있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외우고자 한다. 기대와 흥분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것도 자만일까? 이런 자만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20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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