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비영속적이고,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해방을 얻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다른 사람들이 해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자아를 위한 해방을 이야기한다.
붓다가 해방을 말할 때, 그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급진적인 입장이다.
그대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붓다가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는 유일한 자유는 그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은 계속 장난을 칠 것이다.
마음은 새로운 캔버스에 새로운 욕망들을 그려 넣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변하기 않는다. 그대는 캔버스를 갈아치울 수 있다.
시장바닥에서 나와 사원으로 들어가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천국과 낙원에 대한 똑같은 욕망들을 투영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들여다보라. 마음이 그리는 욕망들을 바라보라. 관찰하고 깨어있으라.
나는 그대에게 반복해서 상기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불교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가 ‘깨어있게 되어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깨어있음이 되어라.’라는 뜻이다.
깨어있는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깨어있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대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갖고 살아가면, 그대는 연속체로 남을 것이다.
그대가 자아의 개념을 떨어버린다면, 그 연속체는 사라진다. 그대는 증발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열반의 뜻이다.
그대가 등불을 끄면 불꽃이 꺼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대가 자신의 욕망하는 마음을 없애버리면 모든 불행과 윤회와 고통은 끝난다.
갑자기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신론자와 붓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거기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붓다는 그대가 멈추면 생전 처음으로 실체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게 진실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고요를 지킨다.
그는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그것 주변에 맴돌며 철학을 만들어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오쇼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기꺼이 (0) | 2021.10.30 |
---|---|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0) | 2021.10.23 |
존재는 왜 오고 가는가? (0) | 2021.09.11 |
도마복음서 (0) | 2021.07.25 |
업보의 초월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