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업보의 초월

황령산산지기 2021. 6. 20. 03:32

키리에

 

명상은 간섭이 아니다. 진정으로 명상이 없으면 그대는 매순간 간섭하게 된다.

명상을 하면 그대는 초월하게 된다. 그대는 언덕 위의 주시자가 된다.

깊은 계곡 아래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대의 일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관조한다.

 

그 일들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거나 꿈이나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그 드라마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대는 그곳으로부터 나왔다. 이제 그대는 배우가 아니라 관중이다. 이것이 유일한 변화이다.

 

그대가 단지 주시자가 되면 육체는 완성되어야 할 것을 즉시 완성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고통을 겪을 여러 업보가 있고, 그대가 이제 주시자가 되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면,

육체는 여러 생에서 고통스러워할 것을 이번 생에서 모두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여러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에게는 미래의 탄생, 미래의 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육체가 될 것이므로 모든 업보와 그 모든 과정이 완성되고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의 시각으로 예수의 삶을 보게 되면, 십자가의 처형은 전혀 다른 현상이 된다.

서양인의 마음에는 여러 번의 생, 부활, 환생이라는 연속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처형을 깊게 분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고, 그의 고통은 우리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사실에 기반을 둔 진실도 아니다.

예수의 고통이 그대를 위한 구원이 되었다면, 왜 인류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인가?

인류는 과거보다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인류는 신의 왕국에 들어간 적이 없다.

예수가 우리 인간을 위해 고통을 받았고, 그의 처형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셈이다.

죄책감과 죄악, 그리고 고통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고통은 헛수고가 된 셈이다. 십자가 처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는 단지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동양의 분석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의 모든 고통이 예수 자신의 업보를 통해 축적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생이었다.

그는 다시 육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그의 모든 고통은 한 지점에 응축되고 집중되어야 했다.

그 한 지점이 바로 십자가의 처형이었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받은 게 아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을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의 과거 업보들을 위해 고통을 받은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업보로 인해서 구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그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노예로 만들 수도 있고 자유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십자가의 처형을 통해서 그 자신의 업보라는 은행 계좌는 해지가 되었다.

 

그는 끝이 났고 구속은 종지부를 찍었다. 모든 인과응보의 과정이 끝난 것이다.

그의 육체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고, 그는 다른 자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러 생 동안 이 모든 것을 고통스러워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지점, 하나의 생에 집중되었다.

 

그대는 간섭할 수 없다. 그대가 간섭하면, 자기 자신에게 더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업보를 간섭하지 말라.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에 주시자가 되어라.

업보를 실체가 아닌 꿈으로 받아들여라.

 

그저 그것을 바라보고 무관심해져라. 개입하지 말라.

그대의 육체가 고통스러워하면 그 고통을 바라보아라.

그대의 육체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을 주시하라.

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 오쇼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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