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를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하는데
견월망지(見月忘指), 이 말은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라는 말이다. 인터넷 검색해서 안 것이다. 이 말의 출처도 알았다. 대승경전 능가경에 나오는 말이다.
스님이 말했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고. 이에 “니까야에서 그런 말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그러자 스님은 “니까야만 경전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경전은 부처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구전된 것을 후대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이를 니까야라고 한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경전을 만들었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님에도 부처님 이름으로 만든 것이다.
대승경전의 저자는 따로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부처님이 말한 것처럼 쓴 것이다. 좋게 말하면 부처님 이름으로 하여 부처님에게 영광을 돌린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가짜경전을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은 불교인이라면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스님은 대승경전도 경전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는 니까야만 부처님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여시아문으로 시작했을 때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인지 알 수 없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모두 부처님 말씀이 되는 것일까?
대승에서는 깨달은 자가 말하면 모두 부처님 말씀으로 보는 것 같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알게 모르게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했을 것이다.
중국 조사스님들도 부처님 반열에 해당된다. 조사어록이라 해서 금과옥조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견월망지라 하여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 이에 스님에게 “그렇군요, 삼귀의 중에서 법귀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또다시 댓글을 달았다.
한국스님들은 왜 한결같이 경전을 부정하는 것일까? 부정은 아니더라도 왜 가볍게 보는 것일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간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계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짜증 내는 사람이 있다. 대개 계행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계행에 대해 비난한다. “한국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라며 오후불식을 말했을 때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계행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도 마찬가지로 본다.
초기경전을 니까야라고 한다. 한역 아함경도 있지만 이제 니까야는 초기경전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것 같다. 니까야가 번역되어 출간 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니까야가 뭐꼬?”라고 묻는 노비구니 스님도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있다. 어느 날 듣도 보도 못한 것이 나타났을 때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한다. 니까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공통적으로 “부처님 친설이라 말하지만 부처님 친설이라고 말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재가불자도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을 것이다. 아마 학자가 이야기한 것을 근거로 들어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종종 불교학자들은 니까야에 대해 비판한다. 니까야에 대해 백프로 부처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후대 첨가되고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물타기라고 볼 수 있다. 대승경전과 동급으로 보기 위해서 폄하하는 것으로 본다.
불교학자들은 왜 니까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일까? 그들이 처해 있는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한국불교에서 주류의 입장에 있다면 니까야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판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스님이 말하면 믿는 경향이 있다. 스님을 삼보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스님에게 삼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삼배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예경하기 위해서 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에게 삼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것도 일어서서 큰 절을 한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오체투지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스님의 한마디는 부처님 말씀과 같은 것으로 본다. 더구나 피에치디(Ph.d) 학위까지 있다면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타이틀이 네 개, 다섯 개나 된다는 스님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니까야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것도 경전적 근거를 밝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때 꼭 나오는 말이 견월망지라는 말이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경전에서 진리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언어는 개념화된 것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진리에 대하여 여러 비유를 들어 언어로써 설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진리가 전승되어 왔다.
만일 부처님이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되어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래 전에 단절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했다. 여기서 진리는 담마(Dhamma)를 번역한 것이다. 번역에 따라 ‘가르침’이라고도 한다. 한역에서는 법(法)으로 통일 되었다. 그러나 담마의 의미는 다양하다. 때로 ‘원리’라고도 번역되고, 때로 ‘것’이라고도 번역된다.
니까야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진리, 가르침, 원리, 법 등으로 문맥에 맞게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진리라는 의미가 강하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상정등각자의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하나하나가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법정스님은 담마빠다를 ‘진리의 말씀'이라고 책 제목으로 했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진리의 말씀을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진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등각자가 말씀하신 것이 진리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니까야에 대하여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했다. 대승경전 금강경에서도 “진어자(眞語者)”라고 했다. 부처님은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광어자(不誑語者)라고 했다. 미친 말을 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은 진실한 것이고 진리의 말씀이 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깨닫지 못한 범부의 말은 진실이 아닌 것이 된다. 거짓을 말하는 자 또는 미친 자의 말이 된다.
니까야는 부처님 말씀으로 가득하다. 회의론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방대한 니까야를 읽어 보면 틀림없는 부처님 말씀인 것을 알게 된다. 계행을 지키지 않은 자가 계행에 대해 이야기하면 짜증 내듯이, 니까야에 대해 이야기하면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자들은 견월망지라고 하여 폄하한다. 해 보지 않은 자가 시도해보지도 않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니까야에 대해 견월망지라고 말한다면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후대 불교는 니까야를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대 경전을 보면 뿌리를 부정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것을 부정해야 했다.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려면 이전 것을 비판하고 심지어 부정한다.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04년 도심포교당에 있는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불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원장스님은 종종 “부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 당시는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스님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 니까야를 보니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띠붓따까(如是語經)를 보면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하신 말씀이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드는 그날 밤까지 45년 동안 설법한 것에 대하여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It.121)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경, 응송, 게송 등 구분교로 설한 가르침은 모두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능가경에서는 “나는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필요에 따라 정반대로 기록한 것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이래 45년 동안 설법했다. 이때 정등각자의 말은 ‘진리 그자체’라고 볼 수 있다. 범부의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범부가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해도 진리가 될 수 없다. 학자가 논문에서 근거를 들어 말하더라도 깨달은 자가 아니라면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말했다면 진실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종단의 이익을 위해서 말했다면 광어자(誑語者)가 될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 귀담아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필기구도 없고 녹음기도 없었기 때문에 잘 새겨듣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새겨들은 것은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사유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가르침대로 실천했을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은 잘 새겨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진리의 말씀은 한사람만 들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여러 사람들이 들었다. 들은 것을 잘 새겨듣고 기억했다. 그리고 실천했다. 이런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자 결집이 이루어졌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합송함으로 인해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입에서 입으로 구전했다. 여러 사람들이 합송한 것이기 때문에 변질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문자화 되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빠알리 니까야를 모두 다 갖추었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는데 빠짐없이 모두 다 갖추었다. 틈날 때마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한권, 두 권 갖추다 보니 이제 책장 가득 되었다.
현재 번역되어 있는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를 모두 다 읽어 보지 않았다. 읽을 때마다 노랑색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놓았다. 연륜이 쌓이다 보니 어느 경전을 열어 보아도 노랑 색칠로 가득하다. 중요한 구절은 덧칠 되어 있다. 어느 것은 덧칠에 덧칠을 해서 반짝거린다. 이렇게 칠을 하다 보니 거의 다 읽어 가는 것 같다. 특히 맛지마니까야와 법구경, 그리고 상윳따니까야 1권은 너덜너덜할 정도가 되었다.
니까야를 견월망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등각자의 말씀은 진리 그 자체로 본다. 손가락이 아닌 달인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정등각자의 말을 폄하했다.
후대 사람들이 만든 능가경에서는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7권, 楞伽經之四)라고 했다. 물론 이에 대하여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라고 했지만 언어로 된 경전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를 니까야와 비교 해 보면 어떻게 말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이띠붓따까)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
구조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능가경에서는 이띠븟따까의 구절을 그대로 가져 와서 필요한 부분만 바꾼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능가경)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It.121)라는 구절을 바꾼 것이다. 그것도 180도 바꾸었다.
부처님은 정등각의 그날 밤부터 열반의 밤에 이르기까지 45년 동안 설법한 것에대하여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It.121)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모두 진리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능가경에서는 정반대로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바꾸어 놓았다
능가경에서는 부처님이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정등각자를 ‘실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또 능가경에서는 견월망지라고 했다. 이는 이름과 글자의 개념에 집착하여 나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변질되어서 경전에 의지하는 사람을 비난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니까야를 비난하는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행위는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정등각자의 말을 간단히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한국불교에 삼귀의가 있을까? 정등각자를 실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정등각자의 말을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한국불교에 삼귀의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한국불교에는 삼귀의가 없다. 부처님(Buddha)도 없고 가르침(Dhamma)도 없고 승가(Sangha)도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등 여러 부처님을 모신다. 여기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각종 보살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가르침도 다양하다. 모두 깨달은 자들의 말로 간주하여 경전도 다양하다. 후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님도 없고 가르침도 없다. 또한 자자와 포살을 행하는 승가도 없다. 한국불교에는 삼귀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법귀의가 없다. 견월망지라 하여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한 한국불교에는 법귀의도 없다. 결론적으로 한국불교에는 부처님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승가도 없다.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누구나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귀의하면 불교인이 된다. 어떤 이는 오계를 말한다. 그러나 오계는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 충분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현재 한국적 불교상황이라면 붓다와 담마라는 이보(二寶)만 있다. 현실적으로 담마만 있다. 정등각자의 원음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일보(一寶)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니까야를 열어 보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보가 된다. 그럼에도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말한다. 머지않아 삼보의 불교가 될 것이다.
니까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다. 정등각자의 말씀은 진리 그 자체가 된다. 우리 불교인들이 법회 할 때마다 “담망 사라낭 갓차미”라고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가르침을 진리로 여기기 때문에 법귀의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침(Dhamma)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을 불교인이라 할 수 있을까?
202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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