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에 깨기 일쑤이다. 늦잠 자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침 6시가 되면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씻고 먹고 하다 보면 7시 가까이 된다. 무조건 집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해만 뜨면 나가야 한다. 요즘과 같은 늦가을에는 해 뜨기 전에 나간다. 나가서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비로소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매일 변함없는 일상이다. 가장 먼저 컴퓨터를 켠다.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미리 구상해 놓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좀 더 원활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커피가 있어야 한다. 원두콩을 절구질한다. 드립커피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몸에 퍼져 나갈 때 글쓰기는 탄력 받는다. 글쓰기 삼매에 몰입하면 오전이 다 간다.
오후에는 해야 할 일을 한다. 먹고 사는 일이다.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보내다 보니 생업이 소홀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종종 실수를 한다. 실수하면 그대로 금전적 손실로 이어진다.
요즘에는 실수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큰 위기를 느낀다. 이대로 가면 거래처가 끊어질지 모른다. 고객이 버리면 수입이 없어진다. 지난 10여년 동안 수많은 업체 또는 사람들과 거래했는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나의 탓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글쓰기에 너무 열중하여 본업을 소홀히 하여 고객이 떠나 간 것은 아닌지 자책해 보는 것이다.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한다. 조금만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크고 작은 사건은 발생한다. 나의 의지와 관련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다. 이럴 때 내탓 또는 남탓으로 여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내탓도 남탓도 아니다. 사건이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어날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를 ‘접촉’으로 설명한다.
접촉없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날 전화 한통 받았을 때 사건은 일어난다. 이전 까지만 해도 새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전화를 받고 나서야 잘못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접촉이 없었다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행위가 익어서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접촉을 연유로 해서 일어난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 여섯 가지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새로운 세상이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오로지 삼사화합에 따른 것이다.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과 시각의식이 합쳐져서 인식작용이 일어난다. 이때 과거 경험이 개입된다. 사과를 보았다면 과거 경험한 시고 단 사과 맛이 떠 오를 것이다. 과거행위가 과보로서 니타나는 것이다. 시각대상과 미각대상이 관련 있는 것이다. 이때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매순간 새로운 세상이 발생한다. 세상이 발생할 때마다 즐거운 느낌의 세상 또는 괴로운 느낌의 세상이 발생한다. 또는 무덤덤한 느낌의 세상이 발생한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한다. 여기에 의도가 개입되면 또 다른 세상이 전개 된다.
세상은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것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설령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배경은 변함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설령 움직임이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배경이 시각의식에 포착되기 때문에 세상은 항상 여기 이렇게 굳건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 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있고, 이런 세상을 인식하는 자아가 있어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영원주의적 견해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빗나간 견해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자아도 없고 세상도 없다. 고정불변하는 자아나 세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조건발생으로 본다. 접촉에 따른 조건발생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아와 세상은 왜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진다. 시각으로만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시각의식이 없다면 세상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각접촉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을 뜨면 세상이 보인다. 눈을 뜬 상태로 있으면 세상은 항상 거기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 한번 깜박임에 따라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눈을 뜨면 세상이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지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들도 잘 관찰하면 움직임이 있다. 다만 그 변화가 너무 느려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은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고 물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낡아지고 있다.
움직이는 대상을 보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본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각에 모두 포착되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수많은 정지화상을 연속해서 돌렸을 때 동화상처럼 보이는 것이 영화이다. 마찬가지로 시각대상 역시 수많은 정지화상의 연결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이를 인식하는 마음도 있어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다.
시각은 사람을 속이기 쉽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각으로 세상을 보면 달라진다. 이를 손뼉치기로 설명할 수 있다.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그런데 손뼉소리는 단 한번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연속으로 쳐도 마찬가지이다. 소리가 났다가 허공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다만 손뼉소리는 기억하고 있다. 손뼉소리는 이미 사라져서 없음에도 이를 인식하는 마음에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마음이 영원하다고 볼 수 있을까?
소리는 접촉에 따라 조건발생한 것이다. 조건발생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리는 소리가 날만한 조건에 따라 발생됐지만 조건이 다 했을 때 머물지 않는다. 머물더라도 송곳 끝에 있는 겨자씨처럼 매우 짧게 머문다. 그리고서는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다만 ‘소리가 있었다’라고 인식하는 마음만 남아 있다. 그 마음 역시 사라진다.
텅 빈 객석은 고요하다. 새벽 대로 차소리는 종종 들린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나지만 이내 고요해진다. 청각의 세계는 시각의 세계와 달리 고요가 지배한다. 가끔 소리가 날 뿐이다. 그렇다고 아예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주파수가 허공에 있지만 귀를 때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바왕가의 동요를 일으킬 정도로 강한 대상이어야 인식한다. 그러다보니 소리는 불연속적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본다면 눈을 껌벅이는 것과 같다. 세상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좌선을 하면 감각대상이 차단된다. 조용한 빈집이나 동굴, 숲에 있으면 청각대상으로 부터 차단된다. 물론 후각, 미각, 촉각도 차단된다. 좌선시 눈을 감으면 시각도 차단된다. 다만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둔다. 그러나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의 문도 닫힌다.
좌선을 하여 여섯 가지 감각을 차단하면 고요해진다. 고요에서 오는 희열과 행복이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앉아 있을 수 없다. 일어나면 모두 다 깨진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대상을 접할 때마다 즐거운 느낌 또는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무덤덤한 느낌도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사띠(sati)하는 것이다.
사띠하면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그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아, 나에게 즐고운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 차리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라면 “아,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끝난다. 느낌이 갈애로 전개되지 않는 것이다.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알아차림은 앎의 영역이다. 앎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이다. 지혜 있는 자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없는 자는 무지한 자이다. 아는 것이 없어서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 길이 죽음의 길임에도 기어코 가려 하는 것은 감각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이를 가르침의 무지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무지한 자들이다.
요즘 가장 두려운 것은 코로나바이러스일 것이다. 작년 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것이 출현한 것이다. 코로나가 무서운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알고 나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악하여 백신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을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죽기 싫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이치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죽음이 닥쳐 왔을 때 초연한 사람이라면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알면 사라진다’고 말한다. 악마는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사라진다. 그래서 “그때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S4.20)라고 했다.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늘 탐, 진, 치로 살아간다. 그런데 탐욕과 분노는 장애라는 것이다. 신체적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장애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탐욕조절장애와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는지 모른다.
탐, 진, 치 삼독 중에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아마 분노일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마치 손오공처럼 마구 두들겨 부순다. 분노조절장애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파탄나고 손실로 이어진다.
행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렇다. 더구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눈물을 흘리며 후회할지 모른다.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순간적인 격분을 참지 못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면 후회해도 이미 늦다.
사람들은 행하고 나서 후회한다. 이는 자신이 어리석음을 뜻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그때 그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분노도 그렇고 탐욕도 그렇다.
분노는 금방 드러나지만 탐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 탐욕이 잘 드러날까? 아마 밥 먹을 때일 것이다. 대부분 밥을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다. 음주도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탐욕으로 먹으면 과식하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리고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8)라며 음식절제를 강조했다.
이것 저것 아무 생각없이 주어 먹다 보면 포만감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탐욕조절장애라는 것을 잘 모른다. 한없이 먹고 싶은 것이다. 절제가 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정에 대한 집착도 그렇다. 나중에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그제서야 이것이 탐욕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탐, 진, 치 삼독중에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분노이다. 그 다음으로 탐욕이다. 어리석은 가장 나중에 드러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하고 나서 후회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나서 후회하고 욕심부리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후회하는 것은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탐욕으로 분노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장애라 하여 반드시 육체적 장애를 뜻하지 않는다. 정신적 장애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장애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세생생 그렇게 살 왔기 때문에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장애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조절장애와 분노조절장애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괴로움을 겪는다. 행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다.
행하고 나서 후회하면 어리석은 삶이다. 후회하기 전에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접촉에 따른 느낌이 발생되었을 때 그 즉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지혜로운 행위에 해당된다. 탐욕과 성냄이 어리석은 행위인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Yo bālo maññati bālyaṃ,
paṇḍito vā 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 ti vuccati.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 (Dhp63)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면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자신에 대하여 지혜로운 자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탐, 진, 치로 사는 사람이 성과를 냈을 때 자만이 생길 것이다. 부자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태생의 자만이 그렇다. 이와 같은 우월적 자만을 가지면 “내가 누군데!”라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기 쉽다. 이것은 알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고 한 것이다.
새벽 두 시 반에 깨어 스마트폰 자판을 쳤다. 지금 아침 여섯 시 반이다. 무려 네 시간동안 집중했다. 어제 최악의 날을 맞이하여 반성의 의미에서 써 보았다. 다시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글쓰기와 생업을 양립한 상황에서 실수가 발생했다.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 돈도 되지 않는 글쓰기이지만 이는 창조적 행위에 해당된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돈을 떠난 데서 나온다. 글쓰기로 먹고 산다면 글쓰기는 노동이 된다. 오늘 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가는 심정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이미 지난 일이다. 과거에 연연하면 불선업을 짓는 것이다. 심기일전이다. 오늘 아침 떠 오른 태양처럼, 오늘부터 잘하면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일도 빈 틈 없이 잘 하면 된다. 둘 다 소중하다. 이렇게 글쓰기 하는 것도 힐링이 되는 것 같다. 문제는 몰라서 발생된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다.
20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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