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 달송

나의 본성이 '나로부터' 잠깨어 일어나는 것

황령산산지기 2020. 10. 4. 09:59

파라다이스

 

나의 본성이 '나로부터' 잠깨어 일어나는 것

 

 

우리는 (대개 갑작스럽게)

자기의 개념이나 신념이나 관념 따위로

쌓아올려지고 형성된 자아관념이

실제로는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관념이 나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관념에는 중심(center)이 될 만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에고는

일련의 지나가는 생각이나 신념이나 행위나 반응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아무런 정체성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가지는 모든 관념들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한 저항일 뿐이다.

 

우리가 에고라 부르는 것은

그저 우리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삶에 저항하는 데에 쓰고 있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에고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이 동사動詞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밀어내기 아니면 끌어당기기이다.

이러한 힘, 이러한 움켜쥐기와 거부하기가

주변의 세계로부터 구별되고 따로 떨어진 자아의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남의 여명과 함께 이 같은 외부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아관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지내던 모든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바고 그 순간 우리는 아주 분명히 깨닫게 된다.

우리의 본성은 그동안 우리라고 여겨왔던 초라한 자아관념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잠깐 스쳐가는 깨어남이든 아니면 보다 긴 동안의 깨어남이든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진리와 실재에 눈을 떠 깨어난다는 것은 이야기하기가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은 언어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어떤 안내자를 벗 삼아 길을 가는 것은 도움이 된다.

 

'깨어남이란 무엇인가'에 해단 경험적인 앎을 한마디로 설명해본다면,

깨어남은 '인식의 전환'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핵심이다.

 

이전까지 나를 하나의 고립된 개체로 보아왔다가

(만약 이 전환 이후에도 자아관념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어떤 존재로,

즉 동시에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곳인 어떤 것으로 보게 되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환을 혁명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그건 마치 아침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이

자신의 얼굴임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신비한 경험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거울 속에 들여다볼 때 여러분은 하나의 단순한 인식을 경험한다.

'아, 저게 나로군.'

 

그런데 깨어남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

우리의 오감이 접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자신으로서 경험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만나는 일체의 대상에게

'아, 저게 나로군' 하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에고의 입장에서,

분리된 개인인 누구라거나 별개인 어떤 '존재(entity)로서 경험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하나(One)'

또는 스스로를 자각하는 '영(Spirit)의 느낌에 가깝다.

 

영적인 깨어남의 하나의 '기억하기'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아닌 어떤 존재가 되지 않기'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나 자신을 무엇과 맞바꾸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잘 알고 있었던 것을 그만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기이다.

 

이 기억하기의 순간에서는,

만약 그 깨어남이 진짜라면,

그것은 나만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나만의 깨어남이라는 것은 없다.

'나만의'라는 말은 분리를 내포하고 있다.

'나만의'라는 말은 잠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는 주체가

'나' 혹은 에고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진정한 깨어남 속에서는, 깨어남 그 자체까지도

나만의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아주 명확히 알게 된다.

바로 보편적인 '영', 보편적인 의식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잠깨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이 '나로부터' 잠깨어 일어나는 것이다.

본래의 내가 '구하는 자(seeker)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내가 '구함(seeking)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남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데에 따르는 문제점은,

위와 같은 설명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궁극적인 진리, 궁극적인 실재란 이러이러하다는

온갖 생각과 관념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들이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의 인식은 또다시 왜곡된다.

 

그래서 실재의 본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며,

또 우리가 배운 바대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이것을 바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볼 능력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말 그대로 어떤 상상도 가닿을 수가 없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지켜보는 그것' 이다.

 

동떨어진 하나의 개인인 양

이런저런 몸짓을 해대는 우리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의식인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모든 경험을 함께하면서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일에 깨어 있다.

 

ㅡ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ㅡ '아디야 산티 / 정신세계사'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