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경래가 불쑥 물었다.
"올바름이란게 뭡니까?"
"과연 진리라는게 뭡니까? 진리는 있습니까?"
구선은 말했다.
"올바름이라는 것은 경계가 드러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도 경계가 세워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엇에 있어서 올바름이라는건 있지만, 아무것이나 그 무엇도 없이는 올바름은 없다 그 말이야."
경래는 모를듯한 얼굴로 구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선은 앞에 있는 컵을 들어 보였다.
"이 컵에 있어서 올바름이 뭡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올바름이 뭡니까.
이 책에 있어서 올바름이 뭡니까. 저 나무에 있어서 올바름이 뭡니까.
저 하늘에 있어서 올바름이 뭡니까.
이렇게 존재가 있다면 올바름이 있지만,
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진리가 있지만 그것이 없이는 올바름과 진리는 없다 그 말이야."
"그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스님."
"우선 너에게 묻자. 이것은 무었이냐?"
구선은 찻잔을 들어 보였다.
"찻잔입니다."
"이 찻잔에 있어 올바름이 뭐냐? 네가 생각하는 올바름을 얘기해 봐라."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봐라."
경래는 찻잔을 앞에 놓고 계속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올바름을 알고자 하면 우선 내 앞에 부여된 경계가 갖고 있는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이 잔은 왜 있느냐. 차를 마시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찻잔이다.
얘의 존재 목적이 차를 마시는데 있는데, 그 차를 마실 때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얘는 올바르게 쓰여질 수도 있고, 그릇되게 쓰여질 수도 있다.
이 찻잔으로 술을 마시든, 물을 마시든, 뭘 마시든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 그릇이 갖고 있는 존재 목적에 맞게 쓰여지면 그것이 찻잔이 갖고 있는 올바름이다.
다만 거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릇과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그릇과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이 속한 주변, 이 세 가지 상황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쓰여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릇은 그릇이 갖고 있는 존재 목적에 입각해서 쓰여지고,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 목적에 입각해서 쓰여지되, 그 쓰여짐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것을 일러 조화라고 얘기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존재 목적과, 경계가 갖고 있는 존재 목적이
주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쓰여질 때 그것이 올바름이다.
찻잔에 있어서 존재 목적은 차를 마시는 것이다.
그걸 아는 것은 쉽다. 하지만 너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은 쉽지가 않다. 너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느냐?"
"모르겠습니다."
"너 스스로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를 모른다면 이 찻잔의 올바름도 볼 수 없다.
찻잔의 존재 목적은 알 수 있으되, 너의 존재 목적은 알 수 없어서
찻잔과 너의 조화를 도모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 찻잔의 올바름을 알 수 있겠느냐?
그 번뇌에 휩싸인 마음, 갈등, 분노, 원망, 그리고 들끓는 애욕,
정리되지 못한 삐뚫어진 심사와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그런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데 어찌 그 차와 네가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똥이 되더라도 그 한 잔의 차는 너와 조화를 이루지 못 할 것이며, 오줌이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차는 차요, 너는 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너의 존재 목적을 바로 알지 못할 때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것에 있어서도 올바름을 보지 못한다.
올바름을 알고자 하면 너의 존재 목적과 경계의 존재 목적을 알아야 하느니라."
"진리라는 것도 그렇습니까?"
"그래. 경계가 나에 입각해서 올바로 쓰여질 때, 내가 경계에 입각해서 올바로 쓰여질 때 그게 바로 진리다."
경래는 길게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저의 존재 목적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앞으로 네가 가야 할 길이다. 너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너 스스로를 불사를 수 있겠느냐?"
"예."
"정말이냐?"
"하겠습니다. 스님 말씀을 들어 보니까 저는 너무나 생각 없이 살았고,
너무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았고, 너무 무분별하게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나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구선은 그 때부터 경래에게 관[觀]을 시키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어라. 육신의 눈과 육신의 귀와 그저 머리의 생각으로만 너를 보지 말아라.
또 사물을 보지 말아라.
마음을 열어서 너를 보고 그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보아라.
그러면 거기에서 네가 너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소설 관 중에서
구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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