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초월적 실체

황령산산지기 2020. 5. 10. 06:24
  
델리아

     

한 무리의 개미들이 식량을 찾아서 어두운 땅속 거처로부터 기어 나왔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개미들은 아침이슬이 내려앉은 풀 옆을 지나갔다.

한 개미가 이슬방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지? 이것들이 어디에서 온 거지?


다른 개미가 말했다.


땅에서 온 거야.


또 다른 개미가 말했다.


바다에서 온 거야.

그러자 갑자기 논쟁이 벌어졌다. 바다 이론을 주장하는 개미들과 땅속 이론을 주장하는 개미들로 나뉘었다.

그때 아주 똑똑한 개미 한 마리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모든 것은 자신의 원천에 이끌리는 게 있다.

그런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은 그 원천으로 돌아간다.

벽돌을 아무리 높이 하늘로 던져도 그것은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빛에 의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빛으로부터 온 것이다.


개미들은 아직 확신하지 못해서 논쟁을 다시 이어가려던 차였다. 그때 태양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슬방울들이 나뭇잎에서 떨어져 태양 쪽으로 증발하더니 이윽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은 자신의 원천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원천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대가 삶을 이해한다면, 죽음도 이해하게 된다.

삶은 원천을 망각하는 일이고, 죽음은 다시 그것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삶은 원천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음은 다시 원천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추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자신의 자유롭고 거침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아름답다.

죽음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살았고, 살아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사랑하고, 춤추고, 축하한 사람들에게만 아름답다.


그대의 삶이 축하일 때, 죽음은 궁극의 축하가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해보겠다. 그대의 삶이 어떤 삶이든 간에, 죽음은 그 삶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다.

그대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이 불행을 폭로할 것이다. 죽음은 대단한 폭로자이다.

그대가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은 행복을 폭로할 것이다.

그대가 육체적 안녕과 쾌락의 삶만을 살았다면, 죽음은 매우 불편하고 불쾌한 게 될 것이다.

육체는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육체는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껍데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밤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침이 되면 떠나는 사원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육체에만 머무는 삶을 살고 육체 너머의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면,

죽음은 매우 추하고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게 될 것이다.

죽음은 번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육체보다 조금 더 높은 삶, 음악과 시를 사랑한 삶,

사랑을 했던 삶, 꽃과 별을 바라본 삶을 살았고,

비육체적인 뭔가가 그대의 의식에 들어왔다면,

죽음은 그다지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평정심을 갖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축하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자기 내면의 초월적인 뭔가를 접촉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기 내면의 무안으로 들어갔을 때-자기 존재의 중심,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곳, 육체적 쾌락이 완전히 사라지고 음악과 시와 문학과

그림 같은 정신적 쾌락도 멀리 사라진 곳에서 그대가 그저 순수한 자각과

의식으로 존재할 때-죽음은 위대한 축하와 위대한 이해, 위대한 폭로가 될 것이다.


그대가 자기 안에 초월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죽음은 그대에게 우주의 초월적 실체를 폭로해줄 것이다.


그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원천과의 만남, 신성과의 만남이 될 것이다.


- 오쇼의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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