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현대 화두선의 한계|

황령산산지기 2019. 11. 3. 15:33

물 흐르듯      

 

□ 수행 체계



식의 체계



의식(안이비설신의)으로 머리에서 인식하여 시작하는 대표적인 수행으로 화두선이 있다.

현대의 화두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의념의 차원에서 머물러 생각 속에서만 화두를 챙기는 병폐에 빠져있다.

그래서 의증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지속적인 의문조차도 간수해 가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해 있는데 이런 방법으로 화두를 들어서는 수억겁을 지나도 깨달을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념화두'에 빠져있다 말한다.

화두를 방편으로 수행하는 이가 '념화두'에 빠져있지 않을려면 식의 작용을 통해 갖춘 의념을 가슴바탕으로 끌어내려서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화두는 단전에서 들어라 하기도 하고 눈앞 1m허공에서 들어라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자체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이다.

그리움을 일으키는 당처는 가슴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슴의 중단전은 모든 감정 활동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감정이다.

한데 어찌 단전에 두어진 화두에서 그리움이 일어날 것이며 목전 1m 앞에 두어진 화두에서 사무침이 생겨날 것인가? 화두를 이렇게 들라고 하는 것은 간화의 법을 제대로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간화선이란' 화두에 대한 의심을 가슴으로 내려서 의심하는 마음 자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아 무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관 법이다.

이때 의식이 갖고 있는 '의념'을 가슴자리로 내리는 자리가 바로 중심 자리이고 '의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때 드러나는 경지가 '의증'이며 온통 '의증'에 두었던 마음이 어느 한순간 쉬어졌을 때 무상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런 상태를 일러 "견성했다." 말한다.



간화선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심에 스스로가 몽땅 빠져 버려야 하는데 의심에 대한 사무침을 갖지 못하면 그런 경지를 이룰 수 없다.

머리에서 형성된 의념을 가슴의 중심 자리에서 품지 못하면 화두에 대한 의심은 끊어져 버리고 망심만 키우게 된다. 때문에 간화의 법에서는 의념을 가슴으로 내려서 의증이 되도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간화선은 그와 같은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저 누구나 화두선이 최고라고만 말할 뿐 올바른 화두법은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것이 현대불교가 쇠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혹 화두를 들고 선을 하는 사람은 이치로써 명제를 풀고자 하거나 맹목적인 념화두로써 공부의 나아 갈 바를 삼고자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간화가 올바로 진행되지 못한다.

수행에 뜻을 두어 출가를 하고서도 10년, 20년을 이와 같이 허송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개인에 인생을 놓고 보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화두를 들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할 면모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의증을 일으킬 수 있는 가슴바탕을 세우는 일이다. 이때의 가슴바탕 또한 중심이 세워지는 바로 그 자리이다.

명치 위 1cm, 속으로 5cm 들어간 지점에 의지를 두고 그 자리의 상태를 살펴서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가슴바탕을 세우는 처음 시작이다.

어떤 방편으로 수행을 하든 누구나 처음 시작해야 할 일이 바로 중심 세우기다.

만약 누가 있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깨달음의 문에 들어설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피나는 노력으로 수행을 하더라도 중심을 세우는 법을 알지 못하면 그는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깨닫지 못한다.



화두는 중심을 세운 이후에 중심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쓰여지는 방편이다.

즉 의증을 통해 중심을 진보시켜서 근본 자성의 공함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화두를 드는 이유이다.

화두를 방편으로 중심의 진보를 도모할 경우 의증에 몰입해 있을 때가 뼈순화에 공법으로 중심의 진보를 도모했을 때, 철벽같은 중심을 갖춘 것과 같은 상태이다.

뚜렷하게 중심자리를 인식 할 수 있으면 (이때 처음 세워지는 중심은 고요한 상태임) 이때부터는 의념을 세울 수 있는 공안을 찾는다.



일반적으로 의념을 세울 수 있는 공안은 스승으로 부터 제시받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스승이 없다면 책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공안을 접해도 좋다.

일단 의심이 세워지는 공안을 접하면 먼저 생각으로 의심을 세워본다.

"왜 그랬을까?" "과연 무슨 말일까?" "무엇일까" 등등에 궁리를 통해 정말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면 점차 의심하는 바가 커져갈 것이다.

이때 의심을 세우는 것도 간절해야 한다. 이 경계를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겠다는 분발심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공안이 갖고 있는 요지를 바르게 파악해서 살아있는 의심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생각으로 궁구하고자 하는데도 지속적인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와 맞는 방편이 아니다. 그럴 경우에는 공안의 요지를 바르게 제시해 줄 수 있는 스승을 찾거나 새로운 공안을 제시받아야 한다.

살아있는 의심을 세울 수 있는 공안은 처음 접할 때부터 그 느낌이 다르다.

그런 공안은 처음 접할 때부터 목구멍에 턱 걸린 것처럼 떨쳐 버릴래야 떨칠 수 없는 상태로 다가온다. 만약 이런 공안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크나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요즘 사람들은 지속적인 사유를 하는 것을 대단히 꺼려한다.

특히나 제시된 의문을 풀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내는 것은 더욱더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답답한 생각에 머물러서 갇혀 있기가 싫기 때문이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얼마나 많은 경계가 스스로를 즐겁게 해주는가? 한데 애써서 답답해지는 것을 누가 좋아하랴.

간혹 수행에 뜻을 두었더라도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저절로 깨달아 질 것이라고 생각할 뿐 애써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도의 본성은 닦아서 얻어지는게 아니라는 둥..

자성은 본래 모든 의식작용을 여의치 않고 있기에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둥..

이런 망발을 일삼는다.

성품의 공함을 드러내서 뒤바뀐 의식체계를 바로 잡고 무상을 자기 주체로 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마치 스스로가 그런 상태인양 분수도 모르고 말을 내뱉으니 참으로 가관이다.

조사선을 함네... 위빠사나를 함네... 조사선의 경지는 이런 것이니 이것이 바른 공부법이네.. 위빠사는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이니 오로지 이 법이 바른 법이네..

이런 망견만 앞세워서 공부를 하고자 하니 어찌 참다운 성취가 있겠는가?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바르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정녕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는가?


나는 정녕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운가?

스스로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서 열반락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응당 나는 닦아야 할 사람이지 언어와 문자의 유희에 빠져 방일할 때가 아니다.

그러니 수행에 뜻을 둔 자라면 마땅히 닦음을 행할 줄 알아야한다.



무엇을 일러 닦음이라 말하는가?

바로 중심의 일과, 근본의 일, 면모의 일과 각성의 증득, 자기제도의 일과, 인식의 틀깨기, 원만한 교류성의 확보와 존재목적의 실현, 이것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 스스로를 닦는 것이다.



화두를 방편으로 닦음을 도모하고자 하면 생각을 통해 세워진 의심을 가슴바탕의 중심자리에서 비춰볼 줄 알아야 한다.

중심을 통해서 의념을 주시한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중심자리에서 의심을 비추는 행위이다.

중심의 고요한 상태에 의심이 비춰지면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비춤의 행위가 반복되면 의심이 가슴으로 내려온 것처럼 가슴바탕이 답답해 오는데 이런 상태가 되면 가슴에 형성된 그 답답함에 의지를 집중하고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켜 본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형성된 답답함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움에 대한 이미지를 자꾸 부여하다 보면 어느 때부터 목구멍이 꽉막힌 것처럼 그 답답함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의증'에 들어간 때이다.

만약 의심을 통해 형성된 답답함이 아니고 중심이 형성되기 이전에 무명으로 인해 갖고 있던 답답함이라면 이토록 목구멍이 꽉 막힌 듯한 상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또 중심의 담담함 그 자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만큼 화두를 통해 형성한 의심은 중심을 진보시키는데 있어 탁월한 효과가 있다.



가슴바탕에 내려온 의심에 그리운 마음을 부여 할려면 누군가 보고 싶을 때 일어났던 그 마음을 세워서 의심자체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했을 때 그 느낌이 어땠었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그 느낌이 어땠었지?
오랫동안 못 보았던 자식이 보고 싶을 때 그 느낌이 어땠었지?

이렇게 그리움이 일어났을 때의 그 느낌을 떠올려서 가슴바탕에 드리워진 의심을 바라볼 수 있으면 의심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나서 의증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의증을 갖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리움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넘치도록 풍요로운 감성을 갖춘 사람은 화두에 대한 의증을 쉽게 갖출 수 있다.

그렇기에 수행을 한다고 해서 스스로의 감성이 메마르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증을 갖춘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그 상태에 몰입해 있을 뿐 따로 다른 일을 도모해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때인가 새로운 경계가 도래하면서 의증이 깨어지는데..

이때를 일러 "시절인연이 도래했다." 말한다.

의증에 몰입해 있는 사람은 느낄 수 없지만 이때 도래하는 시절 인연은 수많은 생을 통해서 쌓아왔던 업연으로 인한 것이다.

서산대사가 닭우는 소릴 듣고 깨달은 것이나. 부처님이 샛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나..
현대의 선지식 숭산스님이 까마귀 울음 소리에 깨달은 것이나.. 모두가 다 시절 인연으로 인한 것이다.

시절 인연은 억지로 도모해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심의 주체에 몰입해 있을 때 자기 고유진동수와 비슷한 파장을 가진 외부 경계를 접하게되면 그때 도래하는 것이다.



가슴바탕에 세워진 중심자리가(명치 위1cm, 속으로5cm) 심의 주체가 된 상태에서는 스스로와 비슷한 파장을 가진 경계가 접해지면 그 자리에서 울림이 일어난다.


특히 소리의 울림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 파장이 중심을 통해 온몸 전체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중심이 세워진 자리가 본래 빈자리기 때문에 비슷한 외부 파장이 접해지면 그 자리에서 공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는 것이 수많은 생의 업연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인데 외부 경계와 자기 중심이 비슷한 고유진동수를 갖추려면 그럴 만큼의 업연이 있어야 한다.

시절인연이 도래해서 중심자리에서 파장이 일어나면 일순간 의증이 사라지면서 중심자체가 텅빈 상태가 된다.

"한 물건도 없다." 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만큼 뚜렷하게 빈자리가 덩그러니 중심을 채우고 있는데 그런 상태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 비로서 성품의 공 한자리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때가 바로 '초 견성'을 이룬 때이다.

이렇게 중심의 빈자리를 인식했으면 이때부터는 그 빈자리에 모든 의지를 집중하고 이제는 그 빈곳에 대한그리움을 일으킨다.

그래서 오로지 비어있는 그 자리가 자기 전부가 되도록 한다.

이 이후에 공법은 뼈순화를 통해 중심의 진보를 도모했을 때 갈비뼈 순화를 이룬 그 이후의 상태와 동일하다.



구선스님